[교회와사회] 로마와 워싱턴, 정치의 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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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일러스트(ChatGPT·DALL·E 생성)
시간은 자주 과거의 고통을 빌려 현재의 길을 묻고는 한다. 7세기,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의 위협에 맞서 신앙의 정통성을 굽히지 않았던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은 결국 유배지에서 고문과 굶주림 속에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1,400여 년이 흐른 2026년 4월 13일, 마르티노 교황의 축일에 로마와 워싱턴 사이의 거대한 균열을 목격하고 있다. 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를 향해 트럼프 대통령이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트럼프가 화가 난 것은 교황이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 정신 차리고 상식을 발휘하라’고까지 말하니, 당파적 강권 ‘통치’의 상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 시기에, 미국 교회는 세 명의 추기경 - 블레이즈 수피치, 조셉 토빈, 로버트 맥엘로 –이 새로 임명되며, 트럼프의 강경 이민 정책에 맞설 윤리적 보루를 마련했다. 추기경들은 낙태뿐만 아니라 이주민 문제 역시 핵심적인 생명 윤리의 영역임을 선언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추방 작전과 공포 정치에 맞섰다. 갈등이 정점에 달한 것은 미국의 이란 침공이다. 맥엘로이 추기경은 이 전쟁의 목적이 불분명하고, 최후의 수단도 아니어서 ‘일부러 선택한’ 비극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피치 추기경은 백악관이 폭격 영상을 영화 장면처럼 편집해 소셜 미디어에 유포하는 행태를 두고 ‘죽음과 고통을 오락으로 만드는 역겨운 비인간화’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취임 초기부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도덕적 위기와 생명의 문제로 생각했다. 교황은 평화가 더 이상 그 자체로 추구되는 선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보며, 이 세계가 얼마나 깊게 ‘힘의 욕망’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드러냈다. 세 추기경들도 '미국 외교 정책의 도덕적 비전 설정’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교황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다. 강대국의 대통령 한 사람이 벌이는 광란을 보며 교황과 추기경들이 한가하게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가(MAGA) 인사들이 나서 교황은 정치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문제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 존엄과 공동선, 연대의 기준으로 공적 질서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행위를 정치라고 하면,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정치적이었다. 교회는 불평등, 낙태 문제, 생명 옹호, 사회 복지, 이민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공적 발언을 활동했다.
복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다룬다면, 공공적인 삶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정치는 공동체의 문제를 다룰 때,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가치들을 포함한다. 그것이 지역적이든, 국가적이든, 국제적인 차원이든 마찬가지다. 교회의 정치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신앙인은 공적 삶에 참여할 때 자신의 신앙에 기반한 가치를 뒤로 제쳐둘 수 없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교회의 오랜 전통인 ‘육체적 자비의 활동’을 보라. 주거, 음식, 이민자 환대, 가난한 이들의 문제 등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을 직접 언급한다.
필요한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정치적인 교회가 되는가이다. 레오 14세 교황의 전쟁 반대는 이상주의적 호소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다. 이 요구는 언제나 정치적인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전쟁과 평화는 결국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평화 옹호는 전쟁과 힘의 정치에 맞서는 또 다른 정치,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중심에 두는 정치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전쟁이 너무 쉽게 정당화되는 시대에, 평화를 끝까지 주장하는 일은 가장 불편한 정치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필요한 정치이기도 하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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