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성찰가이드] "닫힌 마음을 열고, 평화의 길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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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26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성찰 가이드
“닫힌 마음을 열고, 평화의 길을 내며”
맥락
2026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우리는 분단 81년, 한국 전쟁 76년의 시간 속에서 맞이합니다. 한반도는 오랜 세월 같은 땅 위에 살면서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같은 역사의 상처를 안고도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의 언어를 반복해 왔습니다. 길은 끊어지고 대화는 막혔으며, 만남은 점점 더 먼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최근 한반도 정세는 이러한 단절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은 남북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바라보는 시각보다 서로 다른 두 국가, 더 나아가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려는 흐름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민족과 통일의 언어가 지워지고,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쌓아 온 불신은 제도와 담론 속에서 굳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국제 질서 역시 신냉전적 대립과 군비경쟁의 흐름 속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핵과 미사일, 정밀 타격 무기와 억제력의 논리는 평화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오판과 충돌의 위험을 더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숨쉬고 있습니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유해, 만나야 하지만 만나지 못한 사람들, 기억되어야 하지만 잊힌 고통이 한반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만나야 한다는 2026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의 요청은, 평화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상처 입은 역사와 몸을 돌보는 구체적인 행위임을 일깨워 줍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을 향한 마음 안에 어떤 무기를 쥐고 있습니까? 두려움과 분노, 냉소와 혐오, 체념과 무관심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평화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한반도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늘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시작할 수 있습니까?
성경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 에페 2,14
성찰
분단의 시간은 단순히 지도 위의 선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분단은 사람들의 기억과 언어, 가족의 역사와 사회의 감정 속에 깊이 스며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군사분계선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상상하도록 길들여진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해는 제도와 협정의 문제이기 이전에, 오랫동안 굳어진 마음을 다시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는 회심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한반도 현실은 이 회심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남과 북은 오랜 불신 속에서 서로의 말과 행동을 위협으로 읽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대화의 언어는 약해지고, 억제와 대응, 봉쇄와 차단의 언어는 강해지고 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순진한 태도로 오해받고, 평화를 말하는 일은 때로 현실을 모르는 주장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일수록 교회는 평화를 말해야 합니다. 평화가 쉬워서가 아니라,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면 적대의 언어가 우리 마음과 사회를 모두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는 안전한 시대에 주어진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실패와 배신의 기억, 권력의 폭력, 앞으로 닥칠 박해의 불안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평화는 위험이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보상이 아니라, 두려움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는 현존입니다. 그 평화는 먼저 닫힌 마음을 열고, 상처 입은 공동체를 다시 관계 안으로 부르십니다.
한반도의 평화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준비된 뒤에야 평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가 막히고 관계가 얼어붙은 때일수록, 가장 기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자리에서 평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전쟁의 상처를 보듬는 일, 이산가족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 돌아가야 할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 서로의 존재를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으로 바라보는 일은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대의 구조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흔히 평화를 큰 결단이나 역사적 합의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종종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이름 없이 묻힌 이들의 무덤 앞에서, 만나지 못한 가족의 기다림 앞에서, 전쟁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침묵 앞에서, 적이라고 배워 온 이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며 형제자매였음을 깨닫는 자리에서 평화는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를 이념과 체제의 이름으로만 부르던 습관을 멈추고, 한 사람의 얼굴로 다시 바라보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길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적대감은 실제이고, 군사적 긴장도 실제이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또한 매우 현실적입니다. 핵과 미사일의 고도화, 군비경쟁, 신냉전적 대립은 한반도의 불안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화는 단순한 선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현실을 분별하는 지혜와 갈등을 관리하는 인내, 상호 위협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 조치, 그리고 불신을 낮추는 사회적 대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현실을 피해 가는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평화를 선택하게 하는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는 화해를 바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상대가 변화하기만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혐오와 냉소, 우월감과 무관심을 붙잡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무기는 총과 미사일만이 아닙니다. 상대를 단정하는 말, 고통에 무감각해진 마음, 대화를 포기하게 만드는 체념, 평화를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냉소도 우리 안의 무기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교회는 남과 북의 당국자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회심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먼저 적대의 언어에 길들여진 마음을 돌아보고, 분단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무감각에서 깨어나며, 평화를 위한 작고 구체적인 실천을 다시 시작하도록 기도합니다. 평화는 누군가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적대의 순환을 끊을 때 조금씩 자라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은 그래서 기억의 날이며 회심의 날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기억하고, 분단의 상처를 기억하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만나지 못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기억이 미움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기억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를 위해 필요합니다. 상처를 잊지 않되 상처에 갇히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현실을 마지막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질문
1. 내가 평화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붙잡고 있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 태도, 판단, 침묵, 체념 가운데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2. 남북관계와 북한을 생각할 때 어떤 감정을 먼저 느낍니까? 두려움, 분노, 냉소, 무관심 가운데 내 안에 가장 깊이 자리한 감정은 무엇인가요?
3. 우리 사회 안에서 남북을 향한 적대감을 낮추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대화는 무엇일까요? 나는 그 대화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습니까?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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