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를 위한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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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나수진 기자
올 2월 13일 고진수 노동자가 도로 위 구조물 위로 올랐습니다. 그는 쌀쌀한 날씨를 견뎠고 기후 위기를 실감하는 더운 날씨를 통과해 다시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시간을 구조물에서 보냈습니다. 곧 365일 1년이라는 한 주기를 찍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종호텔 앞 인도에 마련된 구유를 보고 있습니다. 이 구유는 고진수와 다른 세종호텔의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바라는 마음이 모아진 구유입니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온 자리는 다름 아닌 고진수가 올라가 있는 구조물을 상징하는 계단 옆입니다. 고진수는 그 계단에 앉아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누워있는 구유를 보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오신 자리는 유다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한 여관의 방도 아닌 마구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는 아기를 따듯한 아랫목도 아닌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화려한 곳이 아닌 누추한 곳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 고진수와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이 있는 자리는 하느님께서 오시고 싶은 자리입니다. 저는 이 구유를 제작한 사람의 상상력에 탄복합니다. 저는 고진수와 해고 노동자들에게 이 구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로가 전해지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의지와 달리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우리를 백화점과 같은 화려한 곳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도록 착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나눌 더 비싸고 화려한 성탄 선물을 사려고 특별한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탄은 우리의 말초적인 욕구 충족과 무관한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위해서 선물을 사지 말고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됩시다.

이 초라한 구유 아래에 “땅으로 오신 예수/고공으로 올라간 노동자/2025 성탄에는 함께 평평한 땅으로”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저에게 “평평한 땅으로”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 사회는 평등이 아닌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된 사회구조와 문화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과 배제란 특정 집단과 개인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불이익을 주고 분리하여 소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임금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적 이익과 참여에서 배제됩니다. 정부와 기업은 이런 차별을 일상화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을 확대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삶의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고 오히려 소모품 취급을 당하여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는 그 사회에서 누가 배제되는지에 의해 정의됩니다. 노동자는 우리 삶의 윤택함을 받쳐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 구성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차별과 배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수준이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 존엄성의 침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K-인권 수준입니다.
하느님께서 누추한 마구간의 구유에 오신 사건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얼마나 깊게 연대하고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누추한 구유는 다름 아닌 기쁨과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관계에는 감정이 개입됩니다.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계는 그저 그런 관계입니다. 관계 안의 긍정적인 감정, 즉 기쁨과 감사, 사랑, 연민, 용서와 같은 감정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서로를 일치시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 즉 두려움, 서운함, 수치심과 같은 감정은 각자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려주는 감정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스스로 고립되어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여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타인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폭력적으로 투사하여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알려주는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더 깊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하느님은 기쁨, 사랑, 연민의 마음으로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시며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친밀함은 취약함을 드러낼 때 형성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충분히 약해져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가 평화의 하느님 모습을 회복합니다. 대림절에 읽었던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11,6-8)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이 평화로운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들이 사랑한 것은 돈과 권력입니다. 돈, 권력이 만들어낸 권위주의는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갈라진 세상으로 만듭니다. 이 갈라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섬처럼 존재합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 사건 성탄은 바로 화해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올바로 기념하고 싶다면 갈라진 세상에서 섬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약자들과의 사랑의 연대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만나주고 계시듯, 성탄은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섬처럼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랑의 연대를 이어가며 성탄을 계속 기념해야 합니다. 고진수와 다른 세종호텔의 해고 노동자들을 찾아와 성탄을 일상에서 기념합시다. 모두들 성탄을 축하합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와 함께 하는 주님 성탄대축일 낮미사’가 12월 25일 오전 11시,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열립니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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