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사회] 새해, 누군가에 선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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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이른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 되는 해였다.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중정)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재일동포 유학생 13명을 포함한 21명의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모두 중정이 날조, 조작한 사건이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남산의 중정 지하실로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되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리던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 간첩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국 사회는 조국을 알려고 찾아왔다 간첩으로 몰린 무고한 청년들을 외면했다.
2010년 이후 재심 절차를 밟은 고문 피해자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은 되돌릴 수 없어, 당시 청년이었던 이들은 이제 모두 노인이 되었다. 지난해 11월 사건 50주년을 맞아 ‘국가폭력 피해자와 함께하는 대화 한마당’이 향린교회와 국회에서 열렸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고문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았다. 듣는 사람도 힘든데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당시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길고도 모진 감옥살이에 들어갔다. 한국 사회의 외면으로 고립무원이 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넨 건 뜻밖에도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이 살던 지역의 일본 사람들이 ‘구원회’를 결성해 교도소로 엽서를 보내고 한국으로 면회를 오는 등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구원회 이야기를 듣고서 성서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떠올랐다. 강도를 당한 한 유대인이 초주검이 되어 길에 쓰러져 있다. 동족 두 사람이 차례로 다가왔지만 모두 피해서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한국과 일본처럼 유다와 사마리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았다. 다음날 여관 주인에게 그를 돌봐달라며 돈을 주고 나중에 돌아올 때 들려 정산하겠다고 말하며 떠났다. 요컨대,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그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과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걸 높이 샀다. 그는 고통받는 낯선 사람에게 오늘 우리가 가장 아끼는 ‘시간’을 내준 것이다. 시간은 삶의 기반이다. 그는 자기 삶의 일부를 내주고는 어떤 대가나 공치사도 바라지 않고 그냥 떠나갔다. 선물은 무상으로 주는 것이다. 자기 삶을 거저 내준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는 선물이었다.
고베에서 온 한 구원회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에 구원회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직접 얘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서른네 번인가 왔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은 어디 어디 가봤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을 꼽았다. 알고 보니, 모두 교도소가 있는 곳뿐이었다. 한국에 오면 교도소로 면회만 갔다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친척이 아니면 면회가 되질 않아서 약혼자로 행세했다. 드디어 자기가 면회를 해왔던 이가 석방된 후 그녀가 누군가에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구원회 활동의 목적은 그의 석방이었다. 이제 그가 석방됐으니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목적을 이뤘다.” 완벽한 무상의 선물, 감동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구원회는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을 건져낸 희망의 선물이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고통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 세상에는 사실 ‘고통을 떠맡는 사람’과 ‘멀찍이 지나쳐가는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착한 사마리아인’과 ‘무심한 행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평범한 내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성서를 보면 사마리아인은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하룻밤까지 함께 한 그의 모든 선행은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리스말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 ‘가엾은 마음’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왔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상대의 아픔을 보고 나도 아픔을 느끼는 ‘애끊는 마음’을 뜻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은 고통의 공감에서 시작한다. “나는 공감 능력이 있을까?”
공감은 ‘스스로 남의 신을 신어보려는 마음”, 기꺼이 남의 처지에 서보려는 의지와 상상력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이 공감 능력을 타고난다는 걸 보여주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공감 능력은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주류경제학이 상정하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보다 남의 처지를 살피고 공감하는 ‘호모 엠파티쿠스’에 가깝다. 우리 사회가 메마르고 각박한 것은 자기 이익과 경쟁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공감 능력을 억누르는 탓이다. 하지만 ‘나’를 벗어나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면 공감 능력이 회복되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쓰러진 사람’이 보이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닮아간다. 선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한 곳에 전해진 선물은 또 다른 곳으로 가는 선물을 낳는다. 선물의 순환으로 세상이 따뜻해지며 사람 사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새해, 우리 모두 누군가에 선물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조현철 신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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