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왜 노동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가?
- - 짧은주소 : https://advocacy.jesuit.kr/bbs/?t=ha
본문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기자
지난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전국 노동사목 관심 신학생 연수가 있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노동소위원회는 전국의 신학교에서 사제로 양성 중인 신학생들을 위해서 다양한 노동 관련 주제를 다루는 강의와 나눔을 준비했다. 나도 모임에 함께해 신학생들을 동반하였다. 프로그램 중에 내 마음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것은 고공농성 노동자와 화상 통화를 통한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우리는 고공농성 현장을 중심으로 세 개의 모둠을 만들었다. 다만 한화 본사 앞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 김형수 노동자는 이미 땅으로 내려왔기에 다른 노동문제의 당사자를 초대했다.
노동자들이 계속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있다. 먼저 구미에 있는 ‘한국 옵티칼 하이테크’는 화재로 생산을 접고 평택에 있는 같은 대표이사 소유의 ‘니토옵티칼’로 생산 물량을 옮겼다. 그러나 회사는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평택 공장으로 고용 승계를 요구했던 노동자들은 옮겨주질 않았다. 그래서 소현숙, 박정혜 조합원이 지난해 1월 8일 불탄 공장 옥상에 올라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올해 2월 13일에는 도심 한복판 명동역 1번 출구 앞 지하차도 차단시설 위로 고진수 세종호텔 지부장이 올라갔다. 세종호텔은 한때 2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함께 일했는데 코로나19를 핑계로 정리해고를 했고, 지금은 20명의 정규직과 40여 명의 비정규직으로 노동자 수를 크게 줄였다. 그리고 접객을 제외한 다른 직군은 하청으로 외주화했다. 그는 지상 10여 미터 높이의 시설물 위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또 올해 3월 15일에는 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이 원청 한화오션에 ‘조선업 숙련노동자 확보를 위한 상용직 고용 확대와 조선 하청 노동자 저임금 개선을 위한 상여금 인상’에 대한 교섭을 요구하며 한화 본사 앞 지상 30미터 높이의 CCTV 철탑에 올랐다. 이 공간은 몸 하나 누울 자리도 확보되지 않은 열악한 곳이다.
다행히 김형수 지회장은 노동조합과 회사가 단체교섭 합의를 이뤄 지난 6월 19일 김형수 지회장은 고공농성 97일 만에 땅을 다시 밟았다. 고진수 지부장은 이미 100일이 훌쩍 넘었고, 박정혜 노동자는 이미 500일이 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눈에 드러난 고공농성의 시간보다 훨씬 길다. 긴 시간의 싸움 끝에 마지막 수단으로 고공농성의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어떤 신학생이 고진수 세종호텔 지부장에게 노동자들의 긴 시간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그는 회사로부터 받은 응어리진 마음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 싸움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응어리진 마음이란 '억울함'일 것이다. 사실 회사는 이미 민주노총 소속의 조합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하여 관광객 수가 줄어들자,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그리고 사직하지 않은 조합원들을 노골적으로 정리해고했다.
우리 사회에서 고용주가 노동자 한 명을 해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집단해고는 생각보다 쉽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라는 정리해고가 바로 그것이다. 대법원도 경영악화를 이유로 세종호텔이 노동자를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했다. 사측은 경영 상태도 호전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이 세종호텔은 함께 오랫동안 재미있게 일했던 정든 곳이다.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한 판결은 그들에게 여전히 정당하지 못한 폭력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억울함으로 응어리가 졌다.
두 주체 사이의 폭력에는 다분히 폭력을 행사하는 측의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지위가 높고, 그래서 우월해. 그러니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해!” 이렇게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폭력이 존재한다면 관계는 발전할 수 없다. 반대로 관계는 서로의 경계가 존중될 때 발전한다. 사실 산업 평화란 바로 노동자의 경계에 대한 존중과 서로에게 맞춰 변화하려는 마음, 즉 상호성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동의 없는 정리해고라는 형식의 집단해고는 폭력이다.
한편, 폭력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선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를 보낸다. 노동자는 고용주의 경계를 무시하는 일방적인 결정에 억울함을 느꼈다. 억울함이란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를 받았을 때 올라오는 분한 감정이다. 우리는 어느 사람도 외부로부터 일방적인 강요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부당한 강요를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다. 고진수 지부장은 고용주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고공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사적으로 소유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등 권력을 남용한 권력자를 향해 4개월의 긴 시간 동안 광장에 모여 그 부당한 권력 남용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고 마침내 그를 파면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켜 희망에 차 있다. 그런데 여전히 부당한 폭력이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세상에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더 높은 곳을 선택해 오르고 있다. 이 높은 곳은 지상의 편리함과 달리 매우 비인간적인 상태이다.
사실 노동자들이 당하는 부당한 처우가 다름 아닌 비인간적인 상태이다. 그러므로 고공농성은 이 비인간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그 비인간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두었다. 이 비인간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둔 노동자는 이 사회와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사회와 우리는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가?”
김정대 신부 (예수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