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하느님이 이루시는 반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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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고진수 노동자가 세종호텔에 복직을 요구하며 도로 위 구조물에 올라간 뒤로 거의 250일이 지났다. 그는 늦겨울 추위를 안고 올라가서 봄을 거쳐 유난히 뜨겁고 긴 여름을 보냈고 이제 조금 한숨을 돌리나 했더니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는 시간을 만났다. 고공농성을 하는 동안, 그의 몸은 면역력을 잃었다. 그는 지금 대상포진을 앓고 있다. 그의 고통은 사용자의 잔인함이 안긴 것이다. 천주교 사제들과 남녀 수도자들, 신자들이 그가 올라가 있는 구조물 아래에서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에 모여 그의 바람과 우리의 염원을 모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의 고통과 사용자의 잔인함을 향한 하느님의 반전을 간절히 바란다. 지난 10월 20일 미사에서 나는 이런 강론을 했다.
최근 나는 믿음이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올해 인기 드라마였던 ‘폭삭 속았수다’를 자주 언급했다. 믿음을 설명하려면 먼저 신뢰라는 감정을 설명해야 한다. 그 인기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양관식이 자신의 딸 금명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빠꾸’라는 표현을 쓴 장면들이 바로 그 감정들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예이다. “금명아, 잘할 수 있지? 수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이렇게 아빠로부터 ‘빠꾸’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외줄을 탈 때마다 아빠는 그물을 펼치고 서 있었다. 떨어져도 아빠가 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이 딸의 고백에 신뢰의 감정이 흠뻑 묻어있다.
이 신뢰는 단일 사건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뢰는 사랑과 애착, 그리고 감사의 정서적 경험이 반복될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리고 믿음은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갖는 감정이다. 그래서 이 딸의 고백은 신뢰를 넘어 아빠에 대한 믿음이다. 딸과 아빠와의 관계에서 아빠는 믿을 수 있는 존재이다. 이렇듯 신뢰의 감정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영양소이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라는 감정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애착, 그리고 감사의 정서적 경험을 내면화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감정을 갖는다. 또 우리는 이 신뢰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관계 안에서 이런 신뢰라는 감정이 아니라 의무감을 강요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문화는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문화가 아니라 목표를 설정하고 사람들을 그 목표로 몰아가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규범은 매우 경직되어서 사람들을 그 규범 안에 가두기도 한다. 그래서 설정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 “괜찮아”가 아니라 “이것도 못해?”라는 질책이 깔린 “왜 그래?”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문화에서 사람들은 신뢰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존감이 약하고 자신감을 잃어 열등감을 내면화한다.
10월 20일 월요일에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례는 루카 복음의 인색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12,13-21)를 들려준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은 재물에 달려 있지 않다고 가르치며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비유로 든다. 그 부자는 많은 소출을 거둔 후 곳간을 확장하고 그곳에 수확한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2,19) 이 부자가 살아온 삶을 추측한다면, 아마도 그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매우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는 그 삶의 목표에 자신을 갈아 넣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다행히 복음서의 그 이야기는 부자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반전이 있다. 하느님은 인색한 그에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12,20) 루카 복음서가 전해주는 이 반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세종호텔 소유주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그 호텔 영업이 가능한 것은 단지 자본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합해져 소비자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기에 이윤이 창출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수고에 사용자는 늘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노사는 서로 신뢰 관계를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호텔 측은 코로나 대유행 시기에 관광객이 줄어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그리고 관광객이 늘어 호텔업계가 호황인 지금 세종호텔은 해고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세종호텔은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지역 명동 한복판에 세워졌다. 웅장함을 드러내는 콘크리트 건물의 딱딱함이 마치 사용자의 인색하고 딱딱한 마음처럼 느껴진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나는 오늘 루카 복음서가 전해주는 반전이 해고 노동자들과 세종호텔 사이에서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느님은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3)
강론 끝에 나는 고진수 노동자에게 말했다. “힘내십시오. 우리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빠구’하세요. 냅다 뛰어 내려오세요. 우린 항상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실패가 아니니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미사 후에 들었다. 고진수 노동자가 지금 대상포진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를 지상 7-8미터 높이의 구조물 위의 긴 투쟁과 지금 대상포진이라는 고통으로 내몰았던 사용자의 잔인함을 보며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반전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정대 신부 (장위1동선교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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