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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사회]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김건태SJ 121.♡.226.2
2025.10.20 13:13 5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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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열(가명)이는 키가 크고 핸썸하다. 그래서일까 여학생에게 인기가 많다. 그런데 호기심이 지나쳤는지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저질렀다. 여학생의 신고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재단 상임 이사 신부님의 합리적인 판단과 선처로 건열이가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변호사와 건열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오후 1시에 경찰서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으러 변호사와 건열이는 올라가고 나는 1층 로비에서 건열이를 기다렸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경찰서에 가는 일이 심심치 않다 보니 여성청소년계의 김 형사님과는 안면이 생겨 또 오셨냐고 인사도 주고받고 조사실로 갔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는다.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시설에 되돌아갔다가 끝나면 전화하라고 약속할 걸 후회도 되었다.

 

그런데 나는 건열이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사를 마치고 1층 로비에 내려왔을 때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고, 또 아동 양육시설까지 혼자 쓸쓸히 되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법률 지식이 없어 직접적으로 변호를 해줄 수는 없었지만, 조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비록 건열이의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시설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여섯 시간의 조사가 끝난 후 저녁 7시쯤 건열이, 변호사님과 나는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여학생과 합의가 잘 되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양측 변호사의 입회하에 서로 화해하고 사과의 편지를 읽고 비록 흉터가 남았지만 관계가 회복되었다. 물론 합의금 500만 원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재판에서 검사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구형했는데 판사님께서 집행유예를 선고해 주신 덕분에 전문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건열이가 무난하게 자립준비청년으로 산 것은 아니다. 전문대학은 곧 중퇴를 했고, 자립 정착금은 운전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나머지 주위에서 그렇게 말렸건만 렌터카를 이용하는데 거의 다 사용했다. 그런데 정말 운전을 좋아하기는 좋아하는 모양으로 요즘은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 1822절에 있다. 이 말씀은 자기 일이 아닐 때는 쉬운데 막상 내가 관여하게 되면 쉽지 않다. 법원 관련 일로 합의금이 필요하니까 자립 정착금 천만 원을 다 쓰지 말고 좀 남겨두라고 신신당부해 두었는데, 렌터카 빌리는 데 다 사용해 버려서 돈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화도 나고 답답하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째 서간 134, 7절 말씀이 생각난다. 사실 용서하는 것도, 참고 기다리는 것도,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건열이가 자립준비청년으로서 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사사건건 따져본다면, 오히려 잘못하고 시행착오를 저지를 때가 더 많다. 그런 건열이를 참아 주고, 덮어 주고, 잘 될 거라고 믿어주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필요하다.

 

건열이의 이야기는 비단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립준비청년들이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심판관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존재다. 부모가 있는 청년들이 성장하면서 누리고 용서받은 것처럼, 건열이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국가에서 자립 수당과 자립 정착금을 지급하고, 토지주택공사(LH)에서 숙소를 도와주고, 자립전담요원 사회복지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있다. 이런 제도들은 필요한 제도들이고 계속 발전시켜 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갖춰져 있더라도 사회구성원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긍정적인 기능도 한계가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자립준비청년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이다. 온갖 편견과 스테레오 타입을 씌워 낙인을 찍지 않고,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따스한 사랑이 필요하다. 자립준비청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자립준비청년들은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트라우마를 겪었고, 열여덟 살이 되면 또다시 익숙한 공간에서 떠나야 하는 2차 트라우마를 겪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부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한다. 또 일부는 산업현장에 취업해서 자신들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선구자들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를 할 때도 있지만, 계속 넘어진 채로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회복탄력성(레질리언스)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히려 외상을 딛고 크게 성장한 외로운 영웅들이다. 만약 자립준비청년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그동안 부모 없이, 가족 없이 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온 청년을 대견하게 여기시면 좋겠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은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축사로 들려주기도 하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한국 사회가 자립준비청년을 대할 때 이뤄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제가 자립준비청년을 대할 때에도 이뤄지기를 기도드립니다.

 

 

김건태 수사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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