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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사회] 말의 전쟁, 원칙의 침식

이송희 121.♡.226.2
2025.04.10 13:27 29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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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늦어지는 탄핵 선고로 인해 높아지던 헌법재판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원망은, 지난 4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선고문을 낭독해감에 따라 눈 녹듯 잦아들었다. 선고 직후, 이번 선고문은 난해한 법률 용어 사용을 자제하면서도 정제된 논리와 평이한 언어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확인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단지 글쓰기의 내적 완결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20여 분간의 낭독 끝에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이 선고되었을 때, 적지 않은 시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란 사태가 비로소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만은 아니었다. 12.3 계엄의 위헌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헌법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시민들이 겨울 내도록 국회 앞에서, 남태령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지켜낸 가치가 무엇인지 역사에 뚜렷이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도덕과 정치를 둘러싼 레토릭의 작동 방식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로서 계엄 이후 위기의식을 느꼈던 부분 중 하나는 지난 몇 달간 "당위""전략"의 구분이 극적으로 흐려지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한 개념이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정치적 레토릭으로 통용되기 시작하면 본의와 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특히 악질적이다. 내란 옹호 세력은 본래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를 지칭하던 내란쿠데타라는 용어를 정쟁 상황을 설명하는 단순한 레토릭으로 변질시켜, 그 의미를 희석하고 자기보존을 꾀했다.

 

계엄이 해제된 직후, 야당의 전횡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호소로서 계엄을 선포했다는 변명은 쿠데타를 전략적 선택지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그런 언어도단은 이 땅에서 군사 쿠데타가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단호히 거부되었어야 했으나, 결국 민심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데 일정 정도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소위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며 선동적 발언들을 그대로 전달한 언론의 책임이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할 일이다.

 

그 뒤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내란 세력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당위"가 자신들을 공격할 때마다 그것을 기괴하게 미러링함으로써 모든 원칙을 레토릭으로 오염시켰다. 클라이맥스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내란죄로 고발했을 때였다. 야당의 정치 행위를 내란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쿠데타와 비교 가능한 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최소한 60%의 국민들은 그들이 시도하는 것이 가치전도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나쁜 태도는 빨리 전염된다는 점이다.

 

탄핵 선고가 기약 없이 길어지고, 그 사이에 납득하기 어려운 사법적 판단들이 이어지던 기간, 불안감 속에서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과 전망을 원했고 그렇게 말이 범람하는 과정에서 오직 법률에 근거해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모든 사법적 판단은 정략적으로 독해되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이미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개별 사안들에 대한 판결이 실제로 전략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개연성도 무척 높아 보였다. 하지만 생각건대, 그럴수록 우리는 단호히 원칙을 요구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전략적으로총리 탄핵은 기각되는 것이 이후의 탄핵 심판에 유리하다거나, 야당 대표의 피선거권도 박탈하는 것이 "공평한" 결정이므로 법원이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거나 하는, 일견 현실적으로 들리는 정세 분석을 반대하고 정의를 요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전략적인 분석과 판단들은 일선에서의 실무자들이 내부적으로 고려할 요소이거나 호사가들의 가십거리일지언정, 공론장에서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도록 두어서는 안 됐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당위와 전략의 구분이 흐려지면, 정의는 선택의 문제로 전락한다. 우리는 원칙과 절차를 지키며 싸우기 때문에 저들보다 힘겹고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는 동료들을 종종 보았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정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물론 울분의 표현일 뿐 나의 친우와 동료들이 정의를 타협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의를 지키는 일을 억울해하는 자가 악당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은 숱한 히어로물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의를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예컨대, 정치인에 대한 성폭력 공론화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을 특정 진영에 대한 공격 전략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활용할 수 있다는 태도가 끔찍이도 만연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피해 사실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건 당위이다. 설령 누군가의 고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 때로 피해 당사자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현실일지라도, 우리는 누군가가 겪은 폭력을 전략적 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해야 한다.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이 정치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 사회는 그런 자들에게 또다시 자격을 부여할 것이냐는 말이다.

 

현대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없는 세계로 정의되고는 한다. 이런 세계에서 정의와 원칙의 힘을 믿자는 말은 공허하게 들리기 십상이라는 것을 안다. 정세 분석과 정무적 판단에 대한 그럴싸한 말들이야말로 명분 이면에 감추어진 진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솔깃해지기 쉽다. 그러나 이번 탄핵 선고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를 수호하는 힘은 바로 그 명분에서 나온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불복으로 인한 추가적인 사회적 혼란 없이 정국이 수습되고 있는 것 또한 선고문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가치를 확인하고 재천명하는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를 정초하는 정의의 힘이다.

 

 

이송희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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