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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사회] 부활절, 우리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김정대SJ 121.♡.226.2
2025.04.17 13:56 1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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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는 오는 20일에 예수 부활을 기념한다. 부활이란 하느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죽음에서 일으키신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건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복음서들도 공통적으로 빈 무덤을 소개한다. 이 빈 무덤을 본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2) 이 말은 그 빈 무덤 자체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 신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빈 무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를 연결시켜준다.

 

이미 언급했듯이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 속으로 놀라워하였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누구에게 보다도 베드로에게 큰 상실감을 주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루카 22,33-34) 그리고 이 예언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예수님이 잡힌 현장에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알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자신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알고도 사랑으로 받아 주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루카 22,54-62) 그런 자신을 받아주신 분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상실감은 우리 삶의 모든 의미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심지어 자신과 과거 사이의 연결을 끊어 자신으로부터도 고립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나의 삶의 한 가운데에 현존하셨던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이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대면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게 해 준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갈릴리를 기억했다. 거기서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신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고,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죄인들을 만나 같이 음식을 나누며 위로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또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시며 파견하시며 같은 일을 하도록 하셨다. 이제 빈 무덤이 베드로에게 묻는다. “어디서 주님을 찾는가?” 베드로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베드로는 이제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지 않고 과거에 예수님이 했던 일을 다시 하면서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부활을 기다리듯,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내란 수괴를 파면하고 민주주의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의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에게 봄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3월에 큰 눈을 내렸다. 4월 중순에도 우리는 내리는 눈을 봐야 했다. 날씨는 여전히 겨울인 듯 차다. 우리의 민주주의도 여전히 겨울이다. 내란 수괴에 대한 파면과 민주주의의 봄 사이에 무엇이 있어 우리는 여전히 겨울인 듯 험한 세월을 경험하는가?

 

우리는 내란 수괴를 탄핵하기 위해서 광장을 메웠다. 탄핵 소추안이 가결 되었을 때, 우리는 시민들이 곧 이 사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란 세력들은 불법 비상계엄을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인정하라며 탄핵 반대를 부르짖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동원해서 탄핵반대 집회를 했다. 반헌법적 행위를 한 국가 통치자에 대한 탄핵이었음에도 다수의 언론에서는 이 반대 여론을 탄핵 여론과 동등하게 다루어 이 문제를 정치적 흥정거리로 만들려고 정치화했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는 정치적 흥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여당에서는 탄핵된 대통령을 지지하였고, 파면된 후에도 여전히 어떠한 형태의 사과도 없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는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방해하려는 듯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정된 재판관을 끝끝내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면 후에는 권한대행이 마치 선출된 통치권자인 양 자격을 의심받는 사람들을 재빨리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정의는 여전히 지연되고 있고, 우리 민주주의는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란 수괴를 파면한 것은 마치 우리 몸에 겉으로 드러난 종기 하나를 제거한 것과 같다. 그 종기 밑에 있는 고름을 제거해야 그 상처 입은 몸이 온전히 치유된다. 우리 사회도 내란 수괴를 둘러싼 고름 덩어리의 존재가 더 문제이다. 이 고름 덩어리의 존재는 우리의 민주주의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지연되는 정의를 보며 그 고름 덩어리가 무엇이고 어떤 형태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지 정확히 보았다. 우리의 민주주의의 봄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이 고름 덩어리를 제거해야 한다.

 

최근 정의를 지연시키는 자들의 저항이 폭력적이고 위협적이고 일방적이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위협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고립될 필요는 없다. 내란 수괴를 탄핵하고 파면시켰던 지난 4개월 동안의 우리의 경험을 기억하자. 우리는 비상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무장한 계엄군을 막아섰고, 국회가 불법 계엄 선포 해제를 결의할 수 있게 했고, 계엄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탄핵 심판에 부쳤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를 파면시켰다. 이를 위해, 계엄 선포부터 파면까지 무려 123일 동안 광장을 지켰고,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에 한남동과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 엄청난 일을 우리는 를 위해서, 옆에 함께 했던 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무장 계엄군을 막아섰던 용기로 다시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광장을 지키며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꾼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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