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노드 이후의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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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7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폐막미사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가 막을 내렸다. 지역 교회별 경청 모임으로 시작된 시노드는 2021년 10월부터 2024년 10월까지 3년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시노드는 많은 이들에게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여성 부제 서품, 교회 내 여성과 평신도의 리더십 강화,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변화 등 구체적인 개혁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시노드의 최종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대부분의 첨예한 사안은 ‘추가 연구’나 ‘지속적 식별’이라는 이름의 과제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시노드 폐막 전에 이미 나오기 시작한 이러한 우려와 실망의 목소리에 제16차 정기총회 책임보고관 장 클로드 홀러리히 추기경은 “성령께서도 시간이 필요하시다”라는 말로 식별의 시간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이며, 상호 이해를 통해 함께 성장하기 위한 시간일 것이라고 부연했다. 실제로 이번 시노드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한 결정이나 선언을 도출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함께 걸어가는 방식의 본질을 새롭게 모색하는 데 있었다. ‘시노드에 관한 시노드’라고도 불린 이번 시노드는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언하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의사 결정과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으로 참여했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겨진 주제들에 관해서도 터부 없이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시노드에서 제기된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는 지역 교회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되새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 역시 우리는 이미 '바꿀 수 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들어섰으며, 이제 중요한 것은 시노달리타스를 어떻게 교회의 일상적 삶과 사명 안에서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할리크 몬시뇰의 말처럼 시노드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시노드 정신을 교회의 삶과 사명의 모든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때 시노달리타스가 단순한 방법론이나 제도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했듯, 시노달리타스 여정의 핵심은 ‘성령 안에서의 대화’와 ‘공동 식별’이며 이는 특히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시노달리타스는 성령의 작용을 함께 식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다수결도 민주주의도 아니며 단순한 의사 결정 방식과 제도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시노달리타스의 영성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이 ‘성령의 이름으로’ 기존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정당화하는 수사로 악용될 위험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교회의 역사에서 ‘영성’과 ‘식별’이라는 단어는 종종 성직자들의 독점적 권위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의 식별은 결코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 백성 전체의 참여를 통해 언제나 풍성해진다. 성령께서는 교계제도의 위계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들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식별을 요구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하느님 백성의 폭넓은 참여와 대화가 필연적인 것은 성령의 소리는 결코 단독으로 식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성적 식별이 결코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들과 분리될 수 없음도 짚고 싶다. 기도와 식별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시노드 이후의 시노달리타스 여정은 반드시 모든 이의 참여를 보장하는 구체적인 구조와 절차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영성’이 제도적 개혁을 미루는 변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노드 최종 문서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수준에서의 투명성과 책임성의 보장이다. 이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평신도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권한 행사에 대한 적절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시노드의 선언이다. 이번 시노드가 명시한 “여성이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나 장애물은 없으며,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선언은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한편 한국 교회가 처한 특별한 맥락에도 머물고 싶다. 한국 사회가 겪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어려움은 ‘시노드 이후의 시노달리타스’가 직면할 도전을 예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시기의 도덕적 순수성과 헌신이 일상의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혼란과 굴절처럼, 시노드의 말과 정신이 일상의 시노달리타스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1999년 발간되어 내면화된 일상적 파시즘을 고발했던 「우리 안의 파시즘」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상당히 민주적인데, 태도는 그렇게 권위적일 수 없는” 모순은 교회 안에서도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제도를 갖추었지만, 그 정신을 내면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시노달리타스 역시 단순히 회의 방식을 달리하고, 교회의 리더십에 일부 평신도를 포함하는 제스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례 받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상호 경청과 평등한 대화, 공동 식별의 태도가 교회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 회심이 절실하다. 수직적 의사소통에서 수평적 대화로의 전환, 투명한 정보 공유, 건설적 비판의 수용 등 교회 안의 전반적인 소통 방식의 혁신이 이 변화를 뒷받침할 것이다. 교회는 이제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서, 선언이 아닌 실천으로서 문화와 의식을 바꿔나가는 긴 여정 앞에 서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시노드도, 그리고 시노드 이후의 시노달리타스도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이는 분명 성령께서 이끄시는 희망의 길임을 믿는다. 이제 시노달리타스를 단순한 구호나 찰나의 이상으로 남기지 않는 것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우리 모두의 몫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폐막미사 강론에서 “우리에게는 안주하고 패배주의에 젖은 교회가 아닌, 세상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교회, 누군가에게 욕을 먹더라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반되는 소란과 지저분함을 기꺼이 끌어안으라는 권고이자, 불확실성과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길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는 초대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서 시노달리타스는 앞으로 계속될 길고 긴 여정이다. 우리는 함께 이 길 위에 섰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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