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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료] [번역자료]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적 인간발전: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제안

인권연대연구센터 118.♡.21.101
2024.09.24 13:10 26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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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로 출범한 로마 교황청의 ‘통합적 인간 발전 촉진 부서(Dicastery for Promoting Integral Human Development)’를 대신하여 ‘인간, 비즈니스, 사회: 포용적 성장 정상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특히 IPADE 학장 라파엘 고메즈 나바, 호세 디에스 데우스타 교수, 그리고 크리스티안 멘도사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2017년)는 IPADE 설립 50주년이자, 바오로 6세 교황이 1967년 3월 26일에 반포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의 50주년이기도 합니다. 이 회칙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비전을 진전시키며 ‘통합적인 인간 발전 (integral human development)’의 개념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이 개념은 지난 50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서, 특히 교황들의 ‘사회 회칙’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오늘 저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을 위한 의제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통합적 인간 발전에 관한 가르침’을 발표하는 영예롭고 기쁜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먼저 ‘포용적 성장’의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어서 바오로 6세 교황부터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사회적 교도권 (Social Magisterium)’의 전통에서 ‘통합적 인간 발전’의 의미와 이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고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어떻게 통합적 인간 발전이 포용적 성장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얘기하겠습니다. 사실, 통합적 인간 발전은 교회가 오래전부터 ‘포용적 성장’ 안에서 모든 이들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방식이었으며, 현재는 유엔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에서도 이 방식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포용적 성장의 의미  


네 명의 경제학자에게 포용적 성장의 의미를 물으면 다섯 가지 답변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포용적 성장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 포용적 성장을 구성하는지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은 포용적 성장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합니다. ‘포용적 성장’은 ‘경제 성장을 할 때, 각 경제 참여자들에게 평등한 기회(equitable opportunities)를 제공하고 사회의 모든 계층이 혜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개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경제 성장 모델을 확장시켜, 건강, 인적 자본, 환경의 질, 사회적 보호, 식량 안보의 형평성(equity)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러한 포용적 성장의 정의는 ‘거시적 경제 성장의 결정 요인과 미시적 경제 성장의 결정 요인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을 함축’한다고 합니다. 미시경제적 차원에서는 경제 다변화와 경쟁을 위한 구조적 전환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거시경제적 차원에서는 국가의 국민 총생산(GNP) 등과 같은 경제 총량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의 의미는 전통적인 경제 성장 모델을 확장하여 건강, 인적 자본, 환경의 질, 사회적 보호, 식량 안보의 형평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입니다. 비슷하게, OECD는 ‘포용적 성장은 금전적·비금전적 측면에서 모든 계층에 기회를 창출하고, 증가하는 번영의 결실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경제 성장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동시에 ‘인간의 복리(well-being)를 중심에 두기 위해 전통적인 경제 성장 모델을 재고할 필요성’을 포함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복리를 중심에 둘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의 중입니다. 한편, 유엔개발계획(UNDP)은 포용적 경제 성장이 단순히 국가 경제를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회의 평등’과 ‘모두의 성장 참여’를 통해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성장은 빈곤층이 종사하는 부문(농업)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발생해야 하며, 빈곤층이 보유한 생산 요소(예: 비숙련 노동)를 활용해야 하며, 빈곤층이 소비하는 물품(식품, 의류, 연료)의 가격을 낮춰야 합니다. 반면, 세계은행은 ‘포용적 성장은 광범위한 성장, 공유된 성장, 빈곤층을 위한 성장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포용적 성장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시장과 고용전환에서의 형평성, 기회균등, 그리고 보호가 경제 다변화와 경쟁을 위한 구조적 전환과 관련되며, 여기에는 일자리와 기업의 창조적 해체도 포함됩니다.

 

포용적 성장은 대개 일차적으로는 경제적 관점에서 이해되며, 세계은행의 경우 경제적·시장적 요인이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OECD와 UNDP에서도 사람들의 복리를 중심에 두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지표는 여전히 경제 중심적입니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의 범위는 확실히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포용적 성장의 주체이자 객체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발전을 향한 소명과 초월을 향한 소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경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에 대한 논의는 인간에 대한 이해, 즉 견고한 성경적 인간학 또는 신학적 인간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발전 및 포용적 성장의 기초로서의 성경 인간학  


가톨릭 교회가 발전과 성장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과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과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한다면, 카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의 지위를 남편과 아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부모)로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형제 관계로 규정합니다. 이는 형제애가 단순히 인간 가족의 확장의 기초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형제들(a-delphoi: 같은 자궁에서 나온)에게 동일한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들은 존엄성에서 평등합니다. 이 성경적 인간 가족의 기원에서 우리는 동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인간)이 존엄성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성에서 평등합니다!  

 

따라서 인간 존엄의 실현으로서의 발전과 성장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발전은 보편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발전시키는 것, 즉 그들의 존엄성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발전이 일부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발전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인간 존엄성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또다른 나’가 있는 한, ‘나’는 결코 완전한 인간 존엄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존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타인’의 존재는 이때 발전이 온전(통합적)하지 않으며, 성장이 포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엄성의 조건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발전과 성장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본래적 가치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성장은 포용적이며, 진정한 인간 발전은 통합적 인간 발전입니다. 즉, 한 인간의 전체 면모와 동시에 모든 인간의 발전을 의미합니다(the development of the whole person and of every person).

 


통합적 인간 발전: 개념화와 적용


이미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1961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를 소집한 교황으로서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움(human personality)의 충분한 발전을 촉진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교육도 통합적이고 완전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제228항).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의 사명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인식하고, 인간의 ‘통합적 소명’에 대해 언급하며, 문화는 ‘인간다움의 통합적 완성,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선’에 복무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공의회 이후, 그리고 유럽의 옛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인류는 발전과 진보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빈곤국의 문제를 유엔에서 호소하며 ‘진정한 인간 발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발전은 단순히 경제 성장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발전이 되려면, 전면적이어야 하며, 각각의 인간과 전체로서의 인간 발전(the development of each man and of the whole man)을 촉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1967년) 집필에 참여한 루이-장 르브레 신부는 이와 관련해, “경제학을 인간의 현실과 분리하거나, 발전을 그것이 이루어지는 문명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즉 각각의 개인, 각 인간 집단, 그리고 인류 전체입니다”라고 올바르게 지적했습니다.

 

비슷하게,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발전 관점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접근한 바오로 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된 프로그램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불평등을 줄이고, 차별을 없애며, 인간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들은 인간 현실의 영역에서 자신의 처지를 증진하고 윤리적 성장을 도모하며, 영적 자질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전을 말할 때, 그것은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진보를 의미해야 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후계자들의 작업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1991)에서 “발전은 경제적 측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전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사람들을 현재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누리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노동을 통해 보다 품위있는 삶을 구축하고, 각 개인의 존엄성과 창의력을 구체적으로 증진시키며, 개인이 자신의 소명에 응답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는 삶을 사는 문제입니다. 발전의 정점은 하느님을 찾고, 그를 알고, 그에 따라 사는 권리와 의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에 그의 두 번째 사회 회칙인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을 썼습니다. 이 회칙 몇 주 전에, 유엔은 「우리의 공동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제목의 브룬트란트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브룬트란트가 주재하는 워킹그룹이 작성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의 기원을 이 보고서에서 찾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사회적 강조점이 두드러진 상황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주어진 그림은 저발전의 경제적·사회적 지표 외에도 다른 지표들을 추가하지 않으면 불완전 할 뿐 아니라 아니라 왜곡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문맹, 고등 교육을 받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 종교적 억압을 포함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1987)을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성했으며, 그 내용은 ‘발전’의 문제와 이를 촉진하는 요소들, 그리고 그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제78-79항). 진정한 발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며, ‘진정한 인간 발전은 모든 차원에서 전체 인간을 아우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발전에 관한 그의 전임자들의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신앙의 빛(Lumen Fidei)」에서 신앙이 단순히 효용과 이익에 기반하지 않는 발전 모델을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신앙은 구체적인 행동의 결과이며,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형제애와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연대성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며, 연대성은 ‘공동체의 관점으로 소수의 재산 소유보다는 모든 사람의 삶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창조’를 요구한다고 덧붙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대성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속한 것을 돌려주는 결정을 의미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는 가난한 사람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발전의 소명을 이행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대성의 실천이 ‘모든 사람은 자기 실현을 추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들 운명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교황 바오로 6세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교황의 가르침으로 본 통합적 인간 발전과 포괄적 성장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발전의 권리 the right to development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촉진에 필요한 몇 가지 매우 기본적인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런 기본 개념 중 일부는 유엔의 ‘발전권에 관한 선언’에도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기본 개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류 공통의 기원과 운명  

2) 모든 사람과 모든 공동체의 평등한 존엄성  

3) 지구에 있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4) 인간의 전체 국면을 포함하는 통합적 인간 발전  

5) 모든 사회 활동의 중심으로서의 인간

6) 건강한 발전을 위한 필수 요소인 연대성과 보조성(subsidiarity).  


마지막으로,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전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들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며, 사회를 깊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의 권리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두 가지는 인간 존엄성에 기반한 평등, 그리고 인간활동의 중심으로서 인격과 연대성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빈곤과 발전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근본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통합적 인간 발전을 중심에 놓지 않고서는 경제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경제 포럼’ 연설에서 경제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 활동이 통합적 인간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모든 비즈니스 활동에서 정직, 청렴, 공정성, 관대함,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덕목이 이윤 극대화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교황은 ‘인류가 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부가 인류를 섬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발전의 구조적 요소를 구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의 과제이지만, 교회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판단의 원칙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 규범이 효과적인 행동을 위한 성찰과 계획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적, 시민적 질서를 세운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에게 합당한 몫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each person receives what is his or her due). 이것이 본질적인 과제로, 모든 세대가 새롭게 도전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과제여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인간적 책임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적 양성을 통해 이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데 기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톨릭 사회 사상은 인간 존재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며, 이 렌즈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삶의 의미를 탐색합니다. 인간에 대한 진리의 충만함이 발전의 구조적 요소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의 중요함을 두고 가톨릭 교회의 사회 교리와 유엔의 발전권 선언 사이의 매우 강력하고 필수적인 융합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의 어떤 실질적인 발전이든, 모든 인간이 동등하고 불가침의 존엄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깨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자주 혼란스럽거나,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바로 이 기본적인 지점이며, 이것은 모든 종류의 부정의와 인권의 남용으로 이어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럽의회에서 말했듯이, “인간 존엄성을 증진한다는 것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 누구도 임의로 빼앗길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개발의 과제에 큰 영향을 주고 빈곤 완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국제 개발의 긍정적인 추세의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세는 인간에 대한 보다 통합적인 이해 없이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것입니다. 우선, 빈곤이 무엇인지 알려면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해가 확인되었습니다. 개발은 경제 개발, 구체적으로 GDP와 경제 성장을 넘어선다는 이해가 확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적발전 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는 지금까지 경제 성장 개념에 포함되지 않은, 교육 수준과 의료 접근성과 같은 ‘인간의 행복과 사회 복리(human flourishing and social wellbeing)’라는 새로운 생각과 정책으로 관심을 확장했습니다. 발전은 창의성과 존엄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좋은 삶’을 구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각자가 개인의 소명에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충만하게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to live a fully human life)’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고한 관점을 선택해야 합니다. 국가와 제도로부터 혹은 개인적으로,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으면, ‘실용’ 혹은 ‘유용성’ 범주가 사회를 운영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 속에서 인간은 ‘물질적 이득이나 가치’에 종속되는 ‘가치’의 변동이 생겨나며, 소비주의나 정치권력의 기능적인 요소로 전락합니다. 이런 경우, 타인의 존엄성은 더 큰 물질적 목적을 위해 ‘희생’되어도 상관 없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인간은 사실상 ‘계층’ 또는 ‘집단’으로 구분되기 마련이고,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진전’에 어느 정도 유용한 수단이 되는지로 나뉜다는 주장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발전을 전체성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런 위험한 접근에 대해 깊게 성찰하고 정직하게 토론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불평등은 사회적 병폐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각각의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의 추구는 모든 경제 정책을 구성하는 우선적인 관심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존엄과 공동선이 진정하고 통합적인 발전을 위한 관점이나 계획이 전무한 정치적 담론을 채우기 위해 집어넣는 부록처럼 보입니다.” 국제사회, 그리고 모든 이해 당사자들 앞에 놓인 과제는 통합적인 인간 개발에 인간과 공동선이 중심이라는 점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만을 선호하는 편향된 시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타인의 권리와 모순되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의 이념은 재고되어야 하며, 둘째는 참된 인간상과 인간 본질이 모든 정치적, 경제적 결정이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용적 성장으로서의 통합적 인간 발전의 몇 가지 특성


1. 초월에 대한 개방성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명백하게, 이는 진심으로 환영할 만한 경향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사회 사상의 통합적 인간 발전에 대한 비전은 정통적인 발전론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갑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간이 좋은 삶과 번영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적어도 암묵적인 견해 없이는 발전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생명의 의미와 운명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서는 발전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통합적 발전이 인간이 지니는 종교적 차원에 대한 개방성과 사려 깊은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발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함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 6세 교황은 “자기 발전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다. 온 창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질서 지어져 있는 것처럼 이성적인 피조물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첫 번째 진리이자 최고의 선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물론 그 뒤를 이은 베네딕토 16세 역시 발전을 소명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통합적 인간 발전은 일차적으로 소명이며, 따라서 이것은 모든 사람이 연대하는 책임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발전의 문제에 개입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만약 발전이 인간 삶의 기술적 측면에만 관련되고, 동료 인간과 함께하는 역사 속의 인간 여정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그 여정의 목표를 식별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면, 교회는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4월 4일,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통합적 인간 발전 촉진 부서’가 주최한 회의에서 통합적 인간 발전이란 몸과 영혼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는 “몸과 영혼을 통합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있는 그 자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발전의 과제도 진정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발전의 비전은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상대로 창조한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반영하며, 영혼과 몸의 통일성 속에서, 하느님과 우리 자신, 창조세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독특하고 침해할 수 없는 고유성을 나타냅니다. 통합적 인간 발전은 근본적으로 소명이기 때문에, 발전은 인간에 대한 초월적 비전을 요구하며, 따라서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 없이 발전은 부정되거나, 인간에게만 전적으로 맡겨져,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며, 결국 비인간화된 형태의 발전으로 끝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관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인간 발전은 숨 쉴 공간을 잃게 됩니다. 역사의 한계에 갇혀, 단순히 부의 축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인류는 더 높은 선을 위해 봉사하는 용기를 잃고, 보편적 사랑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위대하고 사심 없는 새로운 계획을 주도하는 용기를 잃게 됩니다.

 

2016년 9월 25일,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 1주년 기념일에 발표된 ‘2030 아젠다에 관한 교황청의 성명서’에서, 그리고 2015년 9월 25일 교황이 유엔 총회 회원들과의 만남에서 했던 연설에서, 교황청은 발전의 종교적 차원이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없는 하위 문화’가 아니라 모든 국민과 국가의 근본적인 부분이며, ‘본질적으로 종교의례가 수행되는 특정한 장소와 개인 및 가족의 사적 영역을 초월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 발전과 포괄적 성장에서 사랑의 중심적 위치  


이미 50년 전, 복자 바오로 6세는 저발전의 원인이 주로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의 다른 차원들, 즉 첫째로 연대의 의무를 자주 소홀히 하는 의지의 문제, 둘째로 의지에 올바른 방향을 항상 제시하지 않는 사고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도록 권유했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삶을 사랑의 선물로 열어주고,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인간의 전체 국면과 모든 인간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희망, 그리고 덜 인간적인 상태에서 더 인간적인 상태로 이끌어가는 진보에 대한 희망으로 안내하는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 그 원인을 찾도록 했습니다. 

 

교회 전체는 모든 존재와 행동에서—선포하고, 기념하며, 사랑을 실천을 하며—통합적 인간 발전을 촉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며, 모든 것은 그 사랑에 의해 형성되고, 그 사랑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은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며, 그의 약속이자 우리의 희망입니다.

 

3. 발전에서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통합


발전에 대한 복잡한 개념화에서도 발전 과정을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인간의 관계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인간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기본적인 사회 단위들은 여전히 발전에 대한 사유에서 눈에 띄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 6세 교황은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에서 “인간은 사회의 틀 안에 있지 않고는 참으로 그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가족이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연적인 가족, 안정적인 가족, 여러 세대가 함께 살면서 서로 더 큰 지혜를 얻도록 돕고 개인의 권리를 다른 사회적 필요와 조화시키는 가족이 사회의 기초입니다”고 말했습니다(PP, 36).

 

프란치스코 교황은 앞서 언급한 「민족들의 발전」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부서가 주최한 회의에서 통합적 인간 발전이 개인과 공동체 차원을 통합하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서구 세계에서 개인을 고립된 섬으로 찬양하며, 마치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와 공동체는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 안에서만 성숙할 수 있으며, 공동체는 그 구성원 모두가 생산적일 때 비로소 생산적입니다. 이는 특히 사회의 첫 번째 세포이자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인 가족에게 더욱 타당합니다.

교황청의 ‘2030 아젠다에 관한 성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발전의 공동체적 맥락을 ‘힘’과 ‘기억’으로 언급하며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아이와 노인을 돌보지 않는 민족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힘과 기억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래가 없는 민족이다”고 말했습니다.


4. 발전에서의 연대와 보조성(subsidiarity)


또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에서 “인간은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발전이 단순히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n.11)라고 강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제도의 창설이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잘못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통합적 인간 발전은 근본적으로 소명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연대의 책임을 자유롭게 수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진정한 인간 발전은 모든 차원에서의 인간(전인: 全人)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연대와 형제애 안의 단일한 인류 가족’이라는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남녀가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형제애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현대인에게 부여한 ‘엄청난’ 힘이 종종 우리가 ‘전능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ì)에서 상기시켰듯이,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의 삶, 그리고 사회의 유일한 창조자가 아니며, 잘 알려진 속담처럼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상기시킨 바와 같이, 통합적 인간 발전은 지구상의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는 문제입니다. 연대의 의무는 정의로운 분배 방식을 모색하도록 하며, 이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배척하는 사람들과 배척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비극적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민족 간의 통합의 길만이 인류에게 평화와 희망의 미래를 줄 수 있습니다. 교황청은 ‘2030 아젠다에 관한 성명’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 중 ‘지속 가능한 소비 및 생산 패턴 보장’이라는 ‘목표 12’를 단순히 자연 자원의 한계와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연대와 자제력을 촉진하는 기준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통합적 인간 발전은 또한 실행 가능한 사회 통합 모델을 제시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 전체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함께 살아가는 데 유용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도 전체의 선을 위해 무언가를 기여하는 역할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이는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입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인간 공존을 창조해야 한다면, 보조성의 원칙은 개인이든 그룹이든 모든 사람의 기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장하는 원리입니다.

 

 

결론


통합적 인간 발전에 관한 이 짧은 언급을 마치면서, 바오로 6세 교황이 발전과 성장을 진정한 인문학적 종합의 열매로 간주했던 것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말처럼, 진정한 인문주의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며, 우리가 부름 받은 과제를 인식하게 해주고,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제공합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궁극적인 척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실제로 50년 전, 바오로 6세 교황이 ‘새로운 인문주의(new humanism)’에 대해 가르쳤을 때, 교황은 분명히 자신만을 아는 선택에 매몰되는 인간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선에 대한 헌신, 그리고 하느님을 인식하는 객관적인 가치 척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인간을 상상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타인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오늘날의 세속화된 상황에서는 더욱 더 진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인류에게 ‘가장 높은 가치와 그 창조자이자 목적이신 하느님’을 상기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통해 “통합적 생태학은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개방된 범주를 요청하며, 인간다움의 본질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점을 보도록 초대합니다. 「찬미받으소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촉진하는 통합적 생태학의 패러다임은 인간이 하느님, 자기 자신, 동료 인간, 그리고 창조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다움의 통합성을 연마하도록 초대합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밀접하게 상호 연결된 오늘날의 문제들은 글로벌 위기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는 비전을 요구하며, 이는 통합적 관점, 즉 통합적 생태학, 포괄적 성장, 그리고 통합적 발전을 필요로 합니다.

 

 

 

터 턱슨 추기경 연설의 원문 및 각주 표기 된 번역문 전문은 첨부 파일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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