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빼앗긴 땅 팔레스타인에도 ‘성탄’은 오는가?
- - 짧은주소 : https://advocacy.jesuit.kr/bbs/?t=bw
본문
올해는 성탄을 준비하면서 자꾸 2014년 성주간이 떠올랐다. 마침 그해가 학교 안식년이라 좀 외딴곳에서 성주간을 지내려고 수요일 아침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삼척행 버스에 탔더니 텔레비전 뉴스에서 세월호 침몰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모두 구출했다는 자막이 떴지만, 다시 오보라는 보도가 나왔다. 삼척에 도착해 버스터미널에 들어가니 모두 텔레비전에서 세월호 뉴스를 보고 있었다. 삼척에서 머문 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바다고 방에서도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나는 철썩이는 동해의 파도 소리 속에서 남해의 깊은 물속으로 꺼져가는 세월호를 영상으로 지켜봐야 했다. 토요일 오후까지 어떻게 지내고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밤, 부활 성야 미사는 지내기가 정말 난감했다. 미사 후, 부활 축하 인사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올해는 성탄 미사를 드리는 게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땅에서 두 달 넘게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12월 말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인 가자지구에서 2만 명이 넘는 주민이 죽고 7천 명가량이 실종됐다. 사망자의 70%는 어린이와 여성이다. 성탄절에도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알마가지 난민 캠프에서 최소 70명이 숨지는 등 총 250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이 혼란을 틈타 또 다른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인 동예루살렘에 점령촌(불법 정착촌) 확장을 승인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아기로 세상에 오셨을까?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당시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대단한 폭압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제국을 물리칠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를 보내셔야 하지 않았을까? 힘이 곧 정의요 평화인 상황에서 한 아기의 탄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아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예수 탄생을 기리는 우리의 현실도 그때 못지않다. 불평등, 온갖 차별과 배제, 전쟁 그리고 기후를 비롯한 각종 생태 문제가 우리를 짓누른다. 이런 현실에서 성탄을 기리는 것은, 우리가 서로 건네는 성탄 축하의 인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정부 시내에서 북한산 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수녀님 두 분이 난민을 위해 운영하는 집이 하나 있다. 올 초부터 한 달에 한 번 거기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수녀님들과 가톨릭 신자 한둘 그리고 무슬림이 함께 앉아 미사를 드린다. 얼마 전 송년 미사 때는 필리핀 분이 딸 ‘마리아’를 데리고 왔다. 날 보고는 정중히 배꼽 인사를 한다. “몇 살?” 하고 묻자 곧장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다. 붙임성도 좋아 어른 틈에서 놀더니 곧 잠들었다. 미사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마리아’가 엄마를 따라오는 날에는 집 분위기가 바뀐다고 한다. 평소에는 큰 소리로 말하고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남자들의 말과 몸짓이 달라진다는 거다. 서로가 “쉿!” “조용히 해, 아기 자잖아.”라며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집은 평소보다 훨씬 더 평온해진다. 아기가 가져온 변화다.
이 얘기를 들으며,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권력자들, 바이든, 푸틴, 시진핑, 네타냐후, 김정은, 윤석열, 이런 이들일까?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게는 못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아마도 세상의 무력한 존재들, 특히 아기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이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을 움직인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에 깔린 흙투성이 시신들,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부모들, 부모를 빼앗긴 아이들, 이들 모두가 세상의 양심을 흔들고 두드린다. 당신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이 참극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절규한다. 우리가 이 호소에 응답하여 이들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기꺼이 이들의 목소리가 될 때, 세상은 변할 것이다. 아직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응답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2천 년 전 혼탁하고 험한 세상에 하느님이 아기로 오셨던 까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다. 아기로 태어나신 하느님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도록 요청하셨다. 그 요청에 누군가는 막 해산하고도 묵을 방이 없어 노숙해야 할 딱한 처지의 마리아와 요셉에게 마구간의 구유를 내주었다. 성탄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큰 기쁨이다. 동시에 성탄은 하느님께서 그랬듯이, 구유를 내준 이가 그랬듯이, 우리도 가장 무력한 이들에게 강생하라는 하느님의 간절한 요청이다. 더 많은 우리가 이 요청에 응답할 때, 이스라엘에 빼앗긴 땅 팔레스타인에도 성탄은 올 것이다.
조현철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