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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난민] 이슬람 사원, 대구에서는 왜 안될까?

김민SJ 118.♡.21.101
2023.12.20 15:25 1,33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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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19일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에서 ‘2030년 이주민 500만 시대, 환대를 위한 성찰: 대구 이슬람 사원 갈등의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지정토론자로 선정되어 대구 이슬람 사원 갈등에 대해서 급하게 조사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지정토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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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호 선생님이 2020년 이슬람 사원 건축 직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갈등에 대해서 아주 생생한 증언과 성찰을 나누어주셨다. 예수회 인권연대에서 나중에 서창호 선생님을 초대해서 이슬람 사원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이주와 공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나눠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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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 여러 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다. 지금 위의 사진은 대곶에 있는 아스라피아 이슬람 사원이다. ‘중국 정통 마사지오늘은 돼지’-지금은 맘스 터치’- 중간에 있는 이슬람 사원의 모습은 꽤 흥미로운 다문화 공간의 모습이다. 다문화 공간은 다양한 이주민들로 구성된 곳으로, 이주민들의 언어, 가치관, 문화 등이 어우러져 선주민과 상호 영향력을 주고 받는 곳이다. (박종수, “이태원 지역의 종교 공간적 특성과 다문화공간으로의 이해”) 우리에게 익숙한 다문화 공간은 안산시 원곡동, 구로구 가리봉동, 종로구 혜화동, 그리고 이태원동 등이 있다.

 

 

다문화 공간의 형성의 복잡한 사연

 

하지만 대체로 다문화 공간으로 지목받는 곳은 이태원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도시의 변두리나 중소도시에 해당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국의 다문화 공간을 이주민과 선주민이 상호 영향력을 주고받는 곳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좀 더 잔인한 현실을 숨겨버린다. 현실은 이렇다. 이주민의 정착에 대한 선주민의 저항이 최소화되고, 이주민들이 집을 저렴하게 구하고 공동체 인프라를 마찬가지로 값싸게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이 주로 다문화 공간으로 변화한다.

 

한국의 다문화 공간의 특징은 주도적인 에스닉 공동체의 존재이다. 예컨대 동두천이나 의정부는 나이지리아와 같은 아프리카계 공동체가 코어를 형성하고, 김포는 미얀마나 필리핀 등 특정 에스닉 공동체가 코어를 형성한다. 물론 대개의 경우 주도적인 에스닉 공동체 외에도 다른 에스닉 공동체들이 공존하는 형태이기는 하다. 왜 코어 공동체가 형성될까?

 

기본적으로 다문화 공간은 단순히 이주민들의 거주 이상의 인프라가 필요하다. 대체로 보면 다문화 공간의 배후지에 공장이나 농장 지대가 존재하고 그 공장이나 농장의 이주민을 위한 아시안 마트가 개업하면 다문화 공간 형성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다. 아시안 마트는 이주민의 출신국의 고유한 식자재 공급-특히 무슬림에게는 할랄-을 담당하며 따라서 아시안 마트를 중심으로 에스닉한 식당들이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식당들의 주된 고객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이주민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마이크로 크레딧이라고 부를만한 대부업도 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문화 공간의 생태계가 최소한도로 마련된다. 그리고 이 생태계는 이미 정착한 이주민들의 지인이나 친척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일종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된다. 일종의 포탈이 형성되는 셈이다.

 

 

끝없는 계층화의 밑바닥

 

시민적 계층화(civic stratific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시민적 계층화는 정치경제학적인 계급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사회를 좀 더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관념이다. 근대 이후 국민국가 형성에 따라 우리는 모든 시민은 동등한 헌법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상식을 믿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특히 이민 국가의 경우 시민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 시민이라는 대전제는 쉽게 붕괴되기 마련이다. 의료 서비스와 같은 공공재에 대해서 한 국가에 존재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동등한 접근성을 허락할 것인가? 외국인들은 배제할 것인가? 하지만 그 외국인이 노동과 소비를 통해서 온갖 종류의 직접세와 간접세를 지불하는데 이들을 공공재에 대한 동등한 접근성을 허락하지 않는 게 온당한가? 이민 국가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이렇게 복잡하다. 게다가 영주권을 허락한 경우 사태는 더욱 복잡하다. 또 난민의 존재도 있다. 난민의 경우 유엔 협약에 의거하여 자국민과 똑같이 공공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한국처럼 매우 영리하게 특별 기여자라던가, 인도적 체류허가라던가, 갖가지 타이틀로 죽으라고 난민 지위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국제사회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가 일쑤이다.

 

이러한 시민적 계층화는 한국의 지독한 주거문제와 결합하면서 공간적 계층화로 이어진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상위 20개 시군구를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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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이 공장지대와 농장을 배후지로 갖고 있는 중소도시이다. 그리고 이들의 거주형태 역시 아파트 같은 곳은 언감생심, 대부분 고시원이나 보급형 원룸, 반지하, 옥탑과 같은 비주거 거주형태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변부화라고 부른다. 즉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주 지역은 이들의 존재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곳 혹은 선주민들의 신경을 덜 건드리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실 이런 지역 자체가 저소득층 선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거나 이주 노동자들을 클라이언트로 삼고 있는 일종의 경제 공동체 관계에 놓은 선주민들의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이주 저항성이 낮은 곳이 다문화 지역이 되는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시민적 계층화는 공간적 계층화와 함께 간다고 말할 수 있다.

 

 

대구 이슬람 사원의 수수께끼

 

처음 대구 이슬람 사원 갈등이 터져 나왔을 때 굉장히 의아했다. 왜냐하면 사원이 위치한 경북대 대현동은 다문화 공간의 형성에 굉장히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에서 유학생은 시민적 계층화에서 상위 집단에 해당한다. 특히 어학연수생도 아닌 석박사급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주 저항성이 생길 여지가 거의 없는 셈이다. 게다가 무슬림 석박사급의 숫자도 150여 명이고. 둘째, 대학이라는 곳은 학생의 정신적 영적 돌봄에 높은 이해도를 갖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착각으로 밝혀졌지만. 최소한 내가 한국과 외국에서 경험했던 대학은 돌봄의 감수성이 높은 공간이며 카운슬링이나 종교적인 활동이 오히려 촉진되는 특별한 돌봄의 공간이었다. 셋째, 대체로 유학생과 주민들은 일종의 경제 공동체를 형성한다. 유학생들은 대개 주민들의 클라이언트들이고 주민들은 유학생들의 호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주 저항성이 높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왜 모스크라고 거창한 이름을 갖지만 사실 작은 이층집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게다가 갈등의 양상이 점점 더 조직화되고 강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아지게 된 것일까? 왜 돼지머리가 던져지고 너무나도 모욕적인 바비큐 파티-세월호 참사 때의 폭식 사건이 연상되었다.-가 벌어지게 되었을까?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추론해 본다. 첫째, 이슬람 혐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희한하게도 스스로를 유럽과 북미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2010년대 이후 이슬람 난민 사태, 특히 쾰른 무슬림 성폭력 사건 이후 반이슬람 정서가 한국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슬람 신자라고는 한 줌밖에 없는 한국에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시기 한국의 이슬람 혐오를 무슬림 없는 이슬람 혐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와 2022년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입국 이후 무슬림의 현존성이 두드러지면서 이슬람 혐오가 실체화되고 있는 것 같다.

 

둘째, 그리스도교, 특히 우파 개신교의 급진화와 정치화.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 복음주의의 정치화는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부분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개신교 우파의 급진화와 정치화의 두드러진 수단이 전통적인 빨갱이 담론을 넘어서 반이슬람 담론이 되고 있다. 사실 경북대 이슬람 사원 갈등의 급진화도 몇몇 개신교 우파 단체들의 개입에 의한 것임을 감안하면 의심은 확신이 된다.

 

셋째, 다문화 공간 패러다임의 변화. 앞서 줄곧 살펴보았듯이 다문화 공간의 형성은 시민적 계층화와 공간적 계층화의 콤비네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다문화 공간 형성 패러다임은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잘 작동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국경 만들기(bordering)라는 새로운 형태의 반이민 운동을 보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치화된 개신교 우파에서나 활발하게 담론 형성을 하고 있으나 어쩌면 이제 공식화된 정치의 영역에서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경북대 이슬람 사원 갈등은 어쩌면 현재화된 우리의 미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구 이슬람 사원 갈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이다.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것. 국경 만들기는 태평양 건너 도널드 트럼프라는 희한한 캐릭터가 희한한 짓을 하는구나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무슬림 혐오라는 국경 만들기의 주춧돌을 붙잡고 허물어야 한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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