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늙은 교황의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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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너지며 한계점에 다가서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대응은 적절하지 않았다.” 지난 4일 발표된 ‘교황 권고’ ‘Laudate Deum(하느님을 찬미하라)’이 나온 배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후위기에 관하여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에게” 긴급하고 실질적인 대응을 호소하는 이 글은 생태 문제를 다룬 회칙 ‘Laudato Si(찬미받으소서, 2015년)’의 연장이다.
해마다 심해지는 폭염, 가뭄, 산불, 홍수로 삶의 조건이 혹독해지는 걸 체감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여전히 느리고 안이하다. 전 세계를 덮은 먹구름이 나만은 비껴가리라는 요행을 믿는 걸까? 게다가 기후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같은 국제적 현안에 밀려나기 일쑤다. 진영으로 갈려 극심한 정쟁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기후 문제는 아예 실종됐다. 하지만 잊힌다고, 안 보인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더 악화할 뿐이다. 아무리 “이 문제를 부정하거나 숨기거나 얼버무리거나 상대화하려고 해도, 기후변화의 징표는 점점 더 뚜렷해진다.”(5항)
기후 문제가 아무리 위중해도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 축적을 통한 자기 증식의 본질에 충실하다. “유감스럽게도 기후 위기는 딱히 주요 경제 강국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최소 비용과 최단기간에 가능한 한 최대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13항) 그리고 이윤을 위한 성장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늘린다. 이런 현실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의 때를 놓쳤다는 체념도 늘어간다. 체념은 현실 안주를 부추기고, 여기에는 기술에 대한 믿음도 한몫한다.
기후 해법에서 과도한 기술 의존을 경계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생태 문제의 근원으로 제시했던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그사이 더 강화됐다고 지적한다. 기술 발전은 무조건 진보라는 생각, 기술로 세상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더 강해진 것이다. 기술로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 인간 앞에서 자연은 “우리가 감사하고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선물”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해치워야 할 “먹이”로 변했다.(22항) 축산업에선 고기를 만드는 공장이 가축을 키우는 농장을 대신한 지 오래다. 그렇게 축산업은 강력한 온실가스 메탄의 거대한 배출원이 됐다.
기술에 대한 환상은 자연을 혹사하여 생긴 어떤 문제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을 불러온다. 기후 해법으로 ‘탄소 포집·활용·저장’ 기술에 급기야 햇빛을 인위적으로 차단·반사하는 지구공학적 발상도 나왔다. 그러나 기술 중심으로 접근하면 자본 축적을 위해 생산과 소비를 늘려야 하는 자본주의 성장 체제와 온실가스 배출의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가려진다. 신기술 개발에 의한 해결책은 당장은 그럴싸하지만 “언덕 아래로 눈덩이를 굴리는 것 같은 살인적인 실용주의”다.(57항)
능력주의는 기후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능력주의는 흔히 공정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기울어진 운동장에는 실질적이 아닌 기계적인 공정이 있을 뿐이다. “기회의 진정한 평등”이 없을 때 능력주의는 “소수 권력자의 특권을 더 공고히 하는 가림막”으로 전락하고, 기만적인 능력주의는 사회적 무관심의 온상이 된다.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얻은 재력으로 확실히 보호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기후재난은 강 건너 불이다.(32항)
기후위기에 “가장 효과적인 해법은 무엇보다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중대한 정치적 결정”에서 나온다.(69항) 하지만 그동안 유엔 기후 회의에서 결의한 “협약들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52항) 온실가스 “배출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55항) 이제는 무엇을 해도 “주의를 돌리려는 술책”으로만 보인다.(55항) 기후 해법에 개인의 변화도 물론 중요하다. “문화적 변화 없이는 지속적 변화도 없으며, 개인적 변화 없이는 문화적 변화도 없다.”(70항) 하지만 우리 또한 좀처럼 변하려 들지 않는다. 이 모든 현실이 희망의 입지를 좁히지만, 희망을 버리면 각자도생만 남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누구도 홀로 구원”될 수 없다.(19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관도 낙관도 경계하며 문제를 직시하자고 권고한다. 일각에서 떠도는 “종말론적인 진단들은 분명히 비합리적이거나 근거가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임계점에 다가가고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무시해도 곤란하다.(17항) 교황은 과거의 기후 회의에 비판적이지만, 11월 말 화석연료의 주요 수출국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릴 제28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방향 전환”의 때가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54항) 그러려면 “구속력 있는 형태의 에너지 전환”이 필요하다.(59항) 이제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용기”를 내야 할 때다.(56항) 석유로 쌓아 올린 도시 두바이에서 과연 반전이 이루어질까? 이번에는 세계가 늙은 교황의 권고, 아니 호소에 귀를 기울일까?
조현철(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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