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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기후위기와 정의로운 전환

김정대SJ 121.♡.235.108
2023.04.25 13:11 1,3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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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20일 저녁 상상마당 홍대 시네마에서 녹색연합이 기획 제작한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석탄의 일생상영회가 있었다. 석탄은 과거 난방용 연료로 그리고 현재까지도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연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영화는 석탄의 채굴 과정부터 운송 과정, 그리고 석탄과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 그리고 기후위기와 환경파괴와 관련하여 각 과정에서 노동자와 주민들이 당하는 피해와 고통 등 모두 4부로 구성되었다. 상영시간은 45분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기후위기에 대처해야 할 긴급함에 대해서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충격을 주는 방식보다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긴급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가 제공하는 메시지 가운데 ‘4부 외부화가 제공하는 관점이 더 마음에 남는다.

 

외부화란 외부로 떠넘긴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매우 이기적으로 우리의 풍요로운 삶과 이익을 위해서 환경과 지역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노동자들에게 그 피해를 떠넘기고 있다. 부연하자면 우리의 삶의 윤택함을 위해서 석탄을 채굴하는 광부들은 진폐증과 같은 직업병,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작업환경과 같은 문제에 노출되었고, 그 책임은 광부 당사자들이 떠안았다. 광산지역의 환경문제는 어떤가? 또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안전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기업은 전기를 값싸게 생산하며 발생하는 피해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뿐일까? 생산된 대부분의 전력은 대도시와 기업에서 소비하는데 전력 생산으로 발생되는 환경피해는 발전소가 세워진 그 지역의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외부화라는 관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불평등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생각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생태문제는 관계의 문제이다. 관계는 서로의 경계가 존중될 때 깊어지고 발전한다. 경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타인을 내가 원하는 대로 강요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 관계는 깨진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 나는 세상 모든 피조물, 심지어 하찮아 보이는 피조물도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은 창조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이다. 이런 관계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수평적으로 나의 이웃과 다른 피조물의 경계를 존중하며 산다. 이런 관계가 바로 생태적 관계이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도 어긋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익과 편리함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면 이는 경계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닌 폭력이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깨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비폭력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실직에 내몰렸던 광부들의 아픈 경험을 이야기하고, 기후위기를 이유로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할 경우 수많은 실직자 발생과 그 가족들이 겪어야 할 생계 위협과 고통을 예상하고 그들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한때 국가는 석탄 노동자들을 산업역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람들을 광산 현장에 투입시켰다. 그런데 정부는 석탄자원의 수익성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을 발표하여 석탄 노동자들을 실직자로 만들어,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치를 철저히 이익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우리 사회는 자원의 수익성에 따라 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산업역군이라는 가치를 부여받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매우 위계적인 사회이다. 산업 전사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한 석탄 노동자들이 느꼈을 당혹감, 혹은 자괴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런 모습은 그 자체로 얼마나 큰 폭력인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전기를 소비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그 수요에 맞춰 값싸게 전기를 공급한다. 그런데 석탄화력발전 노동자들이 자신이 노동하는 현장이 기후위기의 주범이라고 한다면 그들도 석탄 노동자들처럼 당혹감과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석탄화력발전소의 전력을 생산하는 현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런 불이익에 기후위기의 주범인 산업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는다면 그들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단지 기후위기를 외치는 것만이 정의로운가?

 

기후위기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할 경우 엄청난 수의 실직자가 발생이 예상된다. 문제는 예상되는 실직자들에게 어떻게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할 것인가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에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관점이 들어간다. 우리 사회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를 결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정리해고로 노동자들의 삶을 짓밟은 예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이런 결정은 비인간적이며 일방적이다. 그래서 매우 폭력적이다. 생태문제는 관계의 문제라고 했다. 관계는 경계가 존중될 때 발전한다.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러므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삶도 보장받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우리 사회와 사회 구성원 각자가 무엇을 희생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또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외부화의 대상이 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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