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당장 노동조합법 2·3조를 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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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노동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마치 우리 몸에 피가 돌지 않아 마비되듯 우리 사회가 마비된다.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필품을 조달받을 수 없으며, 도시는 쓰레기로 넘쳐날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딱 3일만 집에서 쉰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불평등이다. 나는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다.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자본의 독주가 시작되면서 경제성장의 이익이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소수의 부자가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여 중산층과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우리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증가로 기업의 인건비 지출이 많이 감소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자본가의 이익이 크게 뛰었다는 의미다. 이로써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에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 시대의 불평등과 가난을 이렇게 지적한다. “오늘날 모든 것은 경쟁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에 있습니다. 여기서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잡아) 먹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일도, 가능성도, 탈출 수단도 없는 등 자신이 배제되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실제 노동자들은 이에 더해 문화적·법적 배제까지 받으며 소외당하고 있다.
한 사회는 그 사회에서 누가 배제되는지에 의해서 규정된다. 한국 문화에서 노동은 천한 일로 취급된다. 노동자는 천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러면 그 천한 노동자가 제공하는 의식주에 기대 편안함과 윤택함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그들의 우월의식에서 고귀함이 아닌 미성숙과 우리 문화의 위계적 폭력을 본다. 이는 문화적 배제이다.
한국의 사회법도 노동자를 배제한다. 자본과 권력은 비정규직을 합법화하는 법을 만들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현행 노동조합법으로는 그들의 노동쟁의가 쉽게 불법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현재 자본은 위험한 작업환경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치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지속하고 있고, 이로 인한 산업재해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같은 산재를 막기 위해서는 진짜 사장이 엄한 응징을 받고 엄중한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실질적 사용자(진짜 사장)들은 하청 노동자의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또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자본으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노동쟁의 자체가 불법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끼여 죽고, 떨어져 죽고, 과로로 죽어간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노동하면 할수록 적자를 면치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반대로 사용자인 자본가들은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다. 노동자가 권리를 주장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법 아래에서 노동은 징벌이 되고 노동자는 노예가 된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폭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사악함 그 자체이다. 이렇게 노동자는 법적으로 배제된다.
인간관계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다. 상대방을 고려하며 변하는 자세가 상호성이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에서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으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7,12)라고 말한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편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해주지 말라”고 했다.
교환의 정의 역시 평등과 상호 이익을 보장하려는 마음에서 성립한다. 즉 교환의 정의는 시장에서 공정한 거래를 주문하고 다른 사람의 정당한 몫을 가로채는 것을 금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이며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나는 대한민국 입법부에 노동조합법 2조와 3조 개정을 촉구하는 청원에 참여했다. 관련해 몇 가지를 요구하고 싶다. 먼저 집권 여당보다 거대 야당에게 개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 야당은 과거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던 거대 여당이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통합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 야당의 정책에선 그 촛불혁명의 정신이 퇴색된 것 같아 매우 실망스럽다. 다시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자가 곧 유권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TV와 소셜 미디어 등에서의 매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매체들은 정보를 대중화하여 자본의 경제활동을 더 철저히 감시하고 시민들이 폭력과 학대를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매체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거나 상업주의에 젖어 폭력과 증오의 연설을 미화하고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부추긴다.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마치 세상을 뒤집힐 것 같은 공포감을 주는 뉴스 생산은 매우 편파적이고 반사회적이다.
마지막으로, 정부 여당은 권력을 시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권력자들은 반대 의견을 경청하고 약자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오늘 가톨릭교회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기념한다. 교회는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순교자로 기억한다.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난 분께 경배하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당황한 헤로데 임금의 두려움을 전해준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력으로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헤로데의 바로 이 모습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폭력으로 사용하는 예이다.
나는 권력가들이 노동자들을 향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모습이, 두려움에 싸여 상대의 기선 제압을 위해 폭력을 쓰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 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중요한 존재이다. “만일 한 사회가 모든 개인의 중요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사회의 목적과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A. F. Campbell, The study Companion to Old Testament Literature,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89) p. 365.) 그러니 두려움에 고립되지 말고 먼저 노동자들의 존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약한 부분을 보살필 때 몸이 건강해진다. 그처럼 사회도 약자를 보살피는 제도를 가질 때 건강한 사회가 된다. 법은 강자를 위한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을 바로잡는 시작이 노동조합법 2조와 3조의 개정이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이 문제에 올바로 응답해야 한다.
2022년 12월 28일 국회 앞 노동조합법 개정을 지지하는 미사 강론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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