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인간의 성(性)은 행위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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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6일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사가 서울광장에서 있었다. 퀴어(Queer)란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퀴어문화축제 조직위가 4월 13일에 이 축제를 7월 12-17일에 서울광장에서 한다고 신청했다. 그런데 서울시는 시장이 48시간 이내에 광장 사용신고 수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지연했다. 그래서 시민 단체가 서울시를 상대로 신속한 결정을 촉구하는 1일 시위를 이어갔다. 나도 지난 6월 2일 점심시간 전후로 서울시청 주위에서 서울시의 결정 지연에 항의하는 피켓팅을 하였다. 결국 서울시는 인색한 결정을 하였는데 광장 사용 날짜를 7월 16일로 축소하였고, 과도한 신체 노출이나 음란물 전시 및 판매 행위를 제한한다고 밝혔다. 이는 광장 사용 조례에 반한 결정이며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결정이다.
나는 약 25년 전쯤 호주 멜번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성적 지향성(Orientation) 문제로 커밍아웃을 하며 사제직을 포기하고 수도회를 떠난 동료를 만난 적이 있다. 동성애자들과 AIDS 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다룬 영화 ‘필라델피아’가 1993년 제작 상영되었을 정도였으니, 그 당시 서구사회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나 역시 그때 동성애자들의 성지향성에 대해서 머리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로 공감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그는 성적 지향성에 대한 혼란으로 늘 우울했고 심한 경우 자살 충동까지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그가 한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해주었고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회규범이 가르쳐온 것과는 다른 자신의 느낌을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사회규범을 따르면서 형성된 성적 자아와 진정한 자기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 간극 사이에서 그는 늘 우울함을 경험했는데 이는 자신을 올바로 대하지 못할 때 갖게 되는 느낌이다. 그는 그 느낌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성소수자들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존중한다. 그와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나의 성적 자아와 성지향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몇 년 전부터 몇몇 성소수자들의 모임과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에 부정기적으로 참석했다. 이날 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을 방문한 이유도 바로 이런 나의 활동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광장은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방해와 위협에서 참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펜스가 처져있었다. 그래서 행사는 더운 날씨와 함께 고립된 느낌이 더해져 더 더운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을 행위로만 이해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날 참석한 성소수자들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그들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문란하다고 한다. 서울시도 이 행사를 허가하며 과도한 신체 노출과 음란물 전시를 제한하였는데 이는 성을 행위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성을 행위로만 이해하는 표현이 많이 있었다. 어떤 표현은 입에 담기조차 거북할 정도로 너무 유치하였다. 이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함께한 이들 가운데 삶의 생기발랄한 에너지와 기쁨을 보았다. 그들의 마음, 표정 그리고 그들의 모든 행위는 문란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성소수자에 대해서 편견을 지니고 있다. 내가 부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게이 아들과 함께 왔다. 그는 자신 아들의 성지향성을 성행위로 단순화하여 아들이 변태적 성행위를 할 것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참석자들은 그가 성을 행위로 단순화 시킨 것이 이해가 안 되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다행히 이런 부모도 오랜 시간 이 부모 모임에 오며 서서히 자녀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의 삶의 지평이 한층 넓어진다. 그래서 이런 가정의 가족들은 삶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가정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성소수자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정 사이에는 사랑과 행복이 느껴진다. 이런 가정의 부모들이 퀴어문화축제에서는 자녀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투사로 함께한다.
우리들의 성은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 전체이다. 성은 행위를 넘은 사랑이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대하는 친절함이며, 또한 친밀한 관계 너머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을 가지고 성장하며 성숙한 사람이 되어간다.
독신생활을 하는 수도자인 나에게 성은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서 성적 성장이 정지된 사람처럼, 혹은 성이 없는 사람처럼 살려고 나 자신과 타인을 엄격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래야 사랑, 친밀함, 연민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나를 지킬 것 같았다. 그러나 독신생활을 하는 수도자가 성을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성적 성장이 정체되면 삶에 생동감이 없어 활력을 잃고 타인과의 관계는 기계적이고 매우 건조해진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수도자로서 독신생활을 하지만 나의 성적 자아와 성적 지향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또한 성적 자아 역시 계속 성장해야 한다.
“섹스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가정, 우정, 그리고 창조성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성이란 이런 것들에 대한 배고픔이고 에너지다.”(로널드 롤하이져, 하느님의 불꽃 인간의 불꽃, 93쪽)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에 대한 무지이며 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sexuality)과 성행위(sex)의 다름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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