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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배우고 익히고, 때때로 나누는 일의 기쁨과 슬픔

정다빈 121.♡.235.108
2022.07.11 17:08 1,62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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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글을 쓰는 것이 힘들었다. 글쓰기는 늘 쉽지 않지만,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20대 후반의 몇 계절을 주간지 기자로 보냈던 나는 얼마간은 마감 없는 글쓰기가 괴로웠다. 월요일 오전까지 그 주일에 발간될 신문에 실릴 기사를 쓰기 위해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타자를 두드리던 습관은, 신문사를 그만두자마자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글쓰기를 시작할 수 없는 고약한 버릇으로 돌아왔다.

 

종교와 여성’, ‘종교와 정치와 같은 뜨거운 주제로 몇 번의 글을 쓰고 나서 들려온 이런저런 말들은 공적인 글쓰기를 저어하게 했다. 글의 맥락과는 크게 상관없는 뾰족한 언질들에 그리 마음 쓸 것 없노라 생각했건만, 역시 왠지 그 이후부터는 논쟁적인 주제에 관한 글쓰기를 내켜 하지 않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단지 싫은 소리를 피하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공적 공간에서 글을 쓰고, 말을 하기에 나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내내 자신이 없었다.

 

돌아보면 지난해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좀 더 알고, 좀 더 생각하며, 좀 더 깊어진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동안 대학에서 경영이나 법과 같은 실용 학문을 공부해 온 나에게 과연 신학과 철학의 세계는 깊고 아름다웠다. 왜 나는 진작 이런 공부를 하겠다고 용기 내지 못했을까, 다른 선택을 했던 열아홉과 스물넷의 내가 못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기대와는 달리 배우는 것이 늘었다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자연히 늘어난 것은 아니다. 읽는 것이 많다고, 꼭 많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님도 매한가지다.

 

시험과 과제로 폭풍 같던 몇 주가 지나고 종강을 맞이하고도 며칠이 지난 지금, “내가 왜 이걸 한다고 나섰던가?”, 근원적 질문 앞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던 때는 어느새 싹 다 잊고 새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일의 즐거움만 되새긴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했던 고민을 부끄럽게 하는 부모님 또래 동기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더 깊고 넓은 배움 앞에 고생을 마다않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쉼 없이 기어오르는 나태에 맞서는 자극이 된다.

 

지난 학기에는 세 과목의 수업과 함께 매주 목요일 상담을 받았다. 3월에 시작해 6월에 끝났으니, 나에게는 이번 학기에 수강한 또 하나의 수업이었다. 매주 같은 요일, 정해진 시간을 쏟으며, 배웠다는 점에서 정말 그렇다. 단지 배움의 주제가 나 자신이었음이 다르다면 다르다. 열두 번의 만남 속에 가장 깊게 들여다본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약함들이다. 나의 열등감, 소외감, 질투, 인정욕구,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 순간 찾아오는 당혹스러움과 분노, 포기와 손절과 도피로의 유혹,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높은 기준과 이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실망과 체념 그리고 자기혐오까지.

 

한편으로는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 두려움과 열등감의 원인에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에 놓는 기질 또는 선택이 있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 경영과 행정을 공부하는 예술학교 학생, 법을 공부하면서도 변호사가 되는 것에 필사적이지 않았던 (적어도 그런척했던) 로스쿨생, 수도자와 일하고 공부하지만 수도자는 아닌, 자주 설명이 필요한 나의 위치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어떤 일을 하시냐?”는 질문 앞에 활동가라고도, 연구자라고도, 저널리스트라고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나의 오늘이 고민을 깊게 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일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들여다본다. 비스킷 공장 노동자, 직업 상담가, 로켓 과학자, 풍경화가, 회계 전문가 등 다양한 일을 가진 사람들의 현장이 흑백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전해진다. 집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대변하고, 규정짓는다. 알랭 드 보통은 다양한 체험 삶의 현장에서 책의 부제처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묻고, 답을 찾는다.

 

책을 읽으며, 나의 삶의 현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책에 포착된 서정적인 흑백 사진의 소재가 되기에 나의 현장은 너무나 단조롭고,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나에게도 유효하다. 일에서 오는 무력함도 기쁨도, 고통도 즐거움도 모두 이 무엇 때문에에서 비롯됨을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내가 무엇인가보다 무엇 때문에 일하는가가 더 본질적이라면, 나는 왜 내가 어떻게 불리며, 어떻게 스스로를 소개해야 할지에 마음을 두었을까.

 

“To know, love and share!”, 몇 년 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청년들이 이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함께 웃는 사진을 보았다. 라트비아에서 열린 유럽 마지스 청년대회 현장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을 자신의 삶을 사로잡았던 세 가지 열정으로 고백한 버트런드 러셀의 회고다. “KNOW, LOVE, SHARE”, 세 가지 단어는 러셀의 열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이 사진이 마음에 오래 남아 책상 한편에 붙여두었다.

 

무엇도 아닌 나로서, 그러나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잊지 않으며, 배우고 익히고, 때때로 나누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맞이하겠다고 다짐해 보는 여름이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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