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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바닷가의 은수자들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며

조창모SJ 121.♡.116.95
2020.06.17 17:04 6,59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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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자(隱修者)란 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단어가 아닌지 모르겠다. 천주교 용어 자료집에 의하면 은수자란 세속으로부터 더욱 철저하게 격리되어 고독의 침묵과 줄기찬 기도와 참회, 고행으로 하느님의 찬미와 세상의 구원에 자기의 신명을 바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바닷가에 사는 동물 중에 은수자(영어로 Hermit)’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종이 있다. 바로 ‘Hermit Crab’이란 동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소라게혹은 집게란 이름으로 불리는 녀석이다. 본래 주인이 사라진 빈 소라껍데기를 집으로 삼아 등에 지고서 사는 게의 한 종류인데 우리나라의 모래사장이나 방파제 등에서도 간혹 보이지만 주로 날씨가 습하고 더운 동남아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이다. 최근에는 이들이 플라스틱병이나 뚜껑을 집으로 삼고 다니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공유되면서 플라스틱에 의한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자료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자신의 집인 소라껍데기를 등에 지고 생활하며 또 때로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쉬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군가가 외딴집에 홀로 떨어져 사는 은수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런 이름을 지어준 모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이들은 위계서열을 갖춘 공동체를 이루며 군락생활을 하는 습성이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소라게를 실제로 본 것은 약 6년 전 필리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주중에는 학교에서 신학과목을 공부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주말에는 근처의 작은 공소나 병원, 대학교 캠퍼스 등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활동을 하곤 하였다. 나는 약 2년 동안 일요일 오전이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공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는데 미사 후에 그곳의 아이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몸이 아파서 미사에 참석하기 힘드신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가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소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오토바이에 작은 상자를 싣고서 무엇인가를 팔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그분이 팔고 있던 것이 바로 소라게들이었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근처에서 꼬마들에게 수평아리들을 팔았던 것처럼 필리핀에서는 소라게들을 채집하여 동네의 꼬마들에게 장난감으로 파는 가난한 노점상들이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 맘속에 무슨 호기심이 일어났는지 야구공만 한 소라게 세 마리를 사서 공동체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잡동사니를 담던 리빙박스를 꺼내어 거기다 집을 만들고서는 게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본의 아니게 고향에서 잡혀 와 좁은 상자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녀석들에게는 미안한 맘도 있었지만 가끔 밀린 과제나 시험 준비 등으로 맘이 산란하거나 피곤할 때 그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놀거나 가만히 쉬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면 다시 맘이 차분해지곤 하였다.

 

사본 -3. 필리핀에서 3년 간 함께 지냈던 소라게들. 사실 어느 동물이든지 본래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jpg


필리핀에서 3년 간 함께 지냈던 소라게들.

 사실 어느 동물이든 본래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최대한 고향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주변에서 관상용 산호사 모래를 구해오고 또 나름 바닷물과 비슷한 소금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소라게를 포함한 많은 갑각류는 죽은 야생동식물을 먹는 생태계의 청소부(scavenger) 역할을 하는 종인지라 음식은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서 잘 먹곤 하였다. 밥풀이나 오이, 생선과 같은 잔반들뿐만이 아니라 특히 팝콘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그들은 그날 이후 약 3년 동안을 나와 함께 한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한국으로의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동료수사님들과 함께 바탕가스란 해변도시에 짧은 휴가를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그날 소라게들과의 동거를 마무리하고서 그들을 그곳의 해변가에 데려다 놓았다. 물론 그들이 원래 살던 본래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으나 주변에 다른 소라게들이 많이 눈에 띄었으므로 나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살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이들의 평균수명은 20년가량이나 된다고 하는데 또다시 3년 가까이 지난 오늘도 그들이 다시 도시로 끌려오지 않고서 더 넓은 세상에서 계속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래본다.

 

그 당시의 체험 덕분에 나는 소라게를 포함한 갑각류 생물들의 습성이나 생태 등에 관하여 조금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성장 과정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포유류와 같은 생물들은 단단한 뼈대가 몸 안에 자리 잡고서 장기나 살과 피부를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게나 가재와 같은 갑각류들은 단단한 껍질이 밖에 자리 잡고서 속의 부드러운 살을 감싸고 있다. 그러기에 이들은 더욱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탈피라고 하는 단단한 껍질을 벗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탈피과정이 여성의 출산처럼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고 위험한 과정이라고 한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던 단단한 보호막을 쪼개고서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탈진하여 죽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특히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녀석일수록 탈피를 위한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므로 탈피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사망할 확률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탈피를 마친 직후에 갑각류의 몸은 예전만큼 단단하게 여물지 못하므로 다른 천적들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더욱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스스로를 보호해주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고통과 스스로의 약함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로서는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과정 안에서 우리들처럼 두려움을 느끼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우리들처럼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다만 때가 되면 성장의 다음 단계로 묵묵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고 사라짐으로써 더 많은 낱알을 맺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무엇인가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더욱 크고 위대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우리들 생명과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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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같은 수도회에 사시는 송봉모 신부님께서 젊은 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아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그것을 깨뜨리고 넘어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큰 생명과 거룩한 사랑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계속 그러한 초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가치관의 깨달음을 통하여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지금의 자리에서 기꺼이 내려오는 것, 그리고 이별과 새로운 만남 등을 통하여 더 큰 사랑과 자유를 배워가는 과정이 그러하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그러한 성장으로의 초대는 각 개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해당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은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화와 세상의 피조물들을 지배나 개발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인간중심주의의 문화가 지구에 불러일으킨 폐해들을 바라보면서 그 심각성을 깨닫고 걱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결과들을 야기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우리 몸의 일부처럼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쉽게 깨닫지 못하고 또 설령 어느 정도 이해했을지라도 구체적인 변화의 실천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속해있는 작은 공동체, 혹은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함께 기억하고 돌보고자 하는 지향을 간직할 때, 그리고 지금 당장의 필요만이 아니라 더욱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들 인류와 지구의 역사와 먼 훗날을 함께 바라보고 고민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은 지금 자신을 가두고 있는 낡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용기와 비전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회심은 몇몇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공감하는 바가 되어야 하며, 또 그 과정 안에서 저항의 고통과 불편을 피해 갈 수는 없으리란 점이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더는 비켜 가거나 미룰 수만 없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성숙한 모습으로 잘 이루어낼 수 있기를 다시 희망해 본다. 각 개인의 신앙 여정 속 회심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바로 지금이 우리들 모두의 결단과 변화를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조창모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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