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잡초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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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 귀에 익도록 들어온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는 이십여 년이 지난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제서품 전 철학 수업 중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주관과 의식의 중요성에 관하여 공부할 때 김춘수의 ‘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요즈음처럼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땅속에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는 잡초들을 볼 때도 ‘꽃’의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빈터에서 자라나고 있는 그들은 이름이 불리기는커녕 작은 몸짓마저 눈여겨보는 이들이 거의 없는지라 미처 ‘꽃’이 되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가 조금은 딱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의 나는 조금의 적대감, 혹은 편견을 가지고서 그들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약 이십 년 전 군에 있을 무렵 여름철이면 우리들은 일과 중 상당히 긴 시간을 잡초를 제거하는 데 소모해야만 했다. 제초작업을 위해 도착한 훈련장과 사격장에서 어느새 우리들의 허리만큼 높게 자라난 풀을 대면했을 때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왔던 장면이 기억난다. 제대 후에 다시는 온종일 잡초들과 씨름하느라 애먹을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수도회 입회 후 수련원에서도 환경미화 시간이나 텃밭 작업 중에 풀을 매게 되었다. 사실 작업량은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예전과 달랐던 점은 나름 거룩한 천주교회의 수사로서 수덕이나 영혼의 구원이란 차원의 의미를 제초작업에 덧붙여 생각하곤 했다는 점이다.
잡초를 뽑으면서 우리들은 마음의 먼지와 때 역시도 함께 말끔히 벗겨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또 성덕이 뛰어나신 어느 교우 분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내가 잡초 한 포기를 뽑을 때마다 연옥의 영혼 한 명을 구원하게 된다는 일념으로 작업에 임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땀 흘려 제초작업을 마친 후에는 노란 모래흙이 드러난 공터를 뿌듯하고 개운한 맘으로 바라보곤 했다.
꽃잔디 사이에 피어있는 제비꽃
(오랑캐 꽃이라고 불리는데 만주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고 하여 Viola Mandshurica란 영어이름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 집 앞마당이나 대문을 무성한 잡초들이 점거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랑스러워하거나 행복해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공간이 우리들의 맘을 차분하게 하고 영혼을 고양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잡초들을 경관을 해치는 훼방꾼, 고민스러운 작업거리, 심지어 내 맘 한편에 자리 잡은 악습의 뿌리로만 여겼던 것은 합당했을까?
비교적 최근에야 나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작년 여름 나는 우리 집의 뒤뜰에서 풀을 전혀 메지 않은 공터의 흙이 더욱 기름지다는 사실을, 그리고 잡초들이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자란 비무장지대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생태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 후 관심이 생겨서 잡초의 생장과 우리들의 환경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관하여 설명한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리곤 하지만 작물이나 잡초가 자라고 있는 흙과 땅은 ‘비어있는 백지(tabula rasa)’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흙과 땅에는 이미 그 안에 수 많은 미세 동물군이 자리 잡고서 먹고 배설하고 번식하고 죽으며 식물들의 생장을 촉진하고 있다. 물론 모든 땅이 그러한 생명력을 풍성히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환경훼손이나 산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막과 같은 척박한 상태로 변해버린 땅을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건물의 오른편 공터에는 주변의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이 자주 방문하는 자생적인(?) 흡연구역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매일 수많은 흡연객들이 그 땅을 밟으면서 그 공터는 단단히 다져진 모래 운동장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으며 아마 당분간 어떤 풀들도 그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해요인들이 사라진다면 땅은 기꺼이 새로운 손님들을 초대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순환 및 확장을 도모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가장 먼저 황무지와 같은 땅에 용감히 발을 내딛는 이들이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질경이, 씀바귀, 민들레와 같은 풀들이다. 그러한 역할 덕분에 그들은 선구식물, 혹은 개척식물(pioneer plant)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불청객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른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뿌리는 땅속 깊은 곳의 광물 등으로부터 영양소를 끌어내고 또 단단하게 굳은 흙을 잘게 부수어 부드럽게 만든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선구식물들의 뿌리와 나뭇잎은 땅에서 부식되면서 그들이 태양과 공기, 빗물 등으로부터 축적했던 영양소를 땅으로 돌려준다. 또한 이들은 흙을 붙들어줌으로써 비나 바람으로 흙이 다른 곳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는 역할도 수행한다.
선구식물들이 자리를 잡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공간에는 다년생 풀들, 키가 작은 관목, 그리고 키가 큰 교목들이 차례로 찾아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선구자의 역할을 맡았던 잡초들은 서서히 이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식물이 조화를 이루고 공생하게 되는 성숙한 경관이 형성된다.
우리들 한 개인의 영혼 혹은 공동체가 성장하듯이 땅 역시도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많은 생명을 키워가고 또 생명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해간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인내심을 가지고서 꾸준히 지켜보기에는 비교적 긴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는 잡초들이 생장하고 소멸하는 모습을 맘속에 그려보자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미리 준비한 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찬미받으소서’ 84항의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목적이 있으며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생태계의 보전과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던 예수고난회의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생물 종의 다양성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금 공터에서 무성히 자라난 잡초나 나무와 같은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우리들은 이들을 역사의 배경 혹은 인간의 지배영역 정도로만 여겨 왔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몸짓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구한 지구의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인간이 등장하고 또 다채로운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등장했던 수많은 피조물이 이 땅 위에 생명의 동산을 이루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에 포함된 것이다. 이름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잡초들처럼 우리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피조물에게도 우리는 이제껏 많은 것을 의지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북극의 빙하와 아마존의 밀림과 같은 우리들의 일상을 말없이 지탱해 온 발판들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에서야 우리들은 그 의미를 절실히 깨닫고 있다.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또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자 존재의 의미로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이러한 생각들을 도무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주의적 태도라고만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거시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혹은 ‘자신들만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공동체 안에서 혹은 각자의 삶 안에서 과거의 산업문명과 새로운 생태문명 사이의 갈등을 더욱 절실히 체험하며 살아가게 되리라 여겨지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생태문명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단순히 분리된 개체들의 파편이 아니라 더욱 거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잡초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의미를 기억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입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들 역시 누군가로부터 각자의 향기와 빛깔에 걸맞은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조창모 신부(예수회)
기쁨나눔재단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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