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암팔라야 열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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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수련수사 시절에 나는 훌륭한 성덕과 신심으로 존경받는 한 평신도 자매님이 계시던 공동체에서 한 달여간 머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 모든 이가 함께 둥글게 모여 앉아서 아침 식사를 나누곤 했는데 메뉴는 주로 전날에 미처 소비하지 못한 잔반들을 모아서 삶은 영양죽이었다.
물론 전날에 남은 잔반이 무엇인가에 따라 죽의 재료도 다소 바뀌곤 했는데 죽에서 고등어나 꽁치 덩어리가 종종 나왔던 기억이 난다. 생선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이른 아침에 큰 냉면 그릇에 담긴 죽에 섞여 있는 생선을 먹는 것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국이 담겨진 그릇을 집을 때면 일부러 생선이 보이지 않는 그릇을 고르고자 나름 관찰력을 발휘하려고 애썼는데 많은 경우 바닥에 큰 생선 조각이 가라앉아 있곤 하였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 전 그릇들 앞에서 잠시 고민하고 있던 나를 지켜보시던 자매님께서 나에게 짧은 말을 던지셨다. “이제껏 제가 지켜본 바로는 음식을 가리는 사람들은 사람도 가리더군요.” 단 한 마디였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가 건드려졌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음식이든 사람이든 내가 가진 편협한 기호나 기준 때문에 쉽게 배척해버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내가 모든 음식을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또 새로이 만났던 모든 사람을 항상 편하고 관대한 맘으로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로서는 참으로 친해지기 어려웠던 음식 중 하나가 필리핀에서의 연학기간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암팔라야’란 생소한 이름의 채소였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에서 자주 봤던 오이와 흡사해 보인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고과(苦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암팔라야 열매
그래서 식당에서 암팔라야 샐러드를 처음 발견했던 날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접시 위에다 암팔라야 열매 조각들을 담았다. 그러고서 식탁에 앉아서 그것들을 내 입에 넣었는데 순간 밀려오는 강한 쓴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고소하고 시원한 오이의 맛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소한 맛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내게 전해진 그 열매의 맛은 이제껏 내가 먹은 어떤 약보다도 쓰게 느껴졌다.
그러한 불편했던 첫인상이 각인된 탓인지 그 이후 오랫동안 다시는 암팔라야 열매를 맛볼 시도를 하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필리핀 국제공동체의 현지 주방장 형제님은 다른 필리핀 음식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요리사 못지않게 김치까지 맛있게 담글 수 있었기에 암팔라야 샐러드에 굳이 다시 눈길을 줄 필요성은 더욱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필리핀에서 두 해를 보내고서 맞이한 2016년 여름방학 중에 동료 수사님들과 함께 팜팡가주의 앙헬레스(Angeles)시에 위치한 산간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1990년대까지 미군의 클라크 비행장이 있었던 곳인데 그 당시의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일부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골프투어나 밤의 유흥과 환락문화 등으로 더욱 잘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그곳의 산간지역에 아이타(Aetas)라고 불리는 필리핀의 소수민족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유난히 작은 키에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와 같이 다른 필리핀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과 쉽게 동화되지 않고서 고유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지키며 살아왔다. 실상 미국의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이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필리핀 땅에 정착하여 오래도록 살아온 토착종족인 셈이다.
아이타 아이들과 함께
약 삼 주간 그곳 산간마을에 함께 머물면서 그분들이 어떻게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며 또 어떻게 고유한 종교예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성찰할 기회가 있었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은 깊은 산간마을에서는 씻고 화장실에 가고 빨래하는 것 모두가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 안에서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그곳 주민들의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이었다. 한 사람이 먹기에도 아쉬워 보이는 구운 달걀 하나를 자녀들뿐만이 아니라 이방인 손님들을 위해서도 조각내어 나누는 모습을 보자니 정녕 깊은 차원에서 눈을 떠야 할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분들께서 매일 아침 친절하고 선한 맘으로 우리들을 찾아와 나누어 주던 소박한 음식 중에 거의 빠지지 않던 것이 하필이면 암팔라야 열매였다. 아마도 주변에 암팔라야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이 지난 후에 이제는 지난 2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이 음식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매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굶주림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분들의 고귀한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차마 못 할 행동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베푼 마음에 가장 올바르게 응답하는 방법은 특별한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그냥 기쁘게 그 음식들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암팔라야 열매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열매가 간직한 고유한 맛에 머무는 법을 조금씩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맛은 수년 전 나의 씁쓸했던 기억과는 상당히 달랐다. 당시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서 급하게 지나쳤던 고유한 감칠맛이 그 안에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미각의 차원을 넘어서 이 열매를 먹은 후에는 머리가 한층 맑고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과는 다른 차원의 든든한 느낌 역시 들곤 하였다.
아이타 사람들의 선한 마음 덕분에 나는 음식이란 단지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온 존재로 함께 받아들이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암팔라야에 대한 부정적 편견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제껏 그 열매의 맛을 다시 볼 기회는 없었다.
마음씨 좋은 물소와 함께
아마도 굳이 음식의 맛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삶 속의 모든 체험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무언가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 혹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그 대상과 가까이 머물거나 어떠한 행동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실천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피상적인 감각을 넘어서 나의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생각과 행동들은 어떠한 것인지를 차츰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씁쓸하고 고통스럽게 여겨지지만 나에게 더 큰 사랑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달콤한 위안처럼 보였음에도 나를 죽음과 어두움 속으로 몰아가는 선택 역시도 가능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살아있는 빵에 비유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하신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가르침을 듣기에 거북하다고 여기고서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 오직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생명에 맛을 들인 이들만이 그분 곁에 남아있기로 선택하였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한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그 ‘맛’을 분별하고 나의 존재 역시도 그 맛을 간직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우리가 속하여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 역시도 그러한 성숙과 성장의 과정을 겪어간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와 주변의 이웃들을 길들이고 지배하고 있는 문화와 가치는 어떠한 것들인지 솔직하게 들여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더욱더 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또 더 큰 힘을 가지고자 하는 충동이 이미 우리들의 맘을 심하게 잠식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두가 함께 공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나 가치관들을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치부해버림으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놓치고 또 미처 맛보지 못하는 행복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내가 산속에서 만났던 아이타 사람들과 같이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그저 쉽게 가련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고만 단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이 매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을 향한 경외심과 공감 능력, 타인들을 향한 존중과 같은 태도가 오래전부터 그들 안에서는 상식과 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더욱 건강한 생명을 키워가면서 나누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작은 이들이 건네어 주는 열매와 그 삶 속의 향기를 맛보고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조창모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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