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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시모노세키에서 생각한 단어들

정진성 163.♡.183.94
2020.03.16 17:07 6,9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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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보통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한반도라는 공간을 점유했던 옛 왕조의 이름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 휴전선 너머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또 다른 조선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헬조선처럼 자조적으로 표현되곤 하는 우리의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조선은 어느 모로 보아도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게 조선은 먼 봉건시대의 이름이거나, 적의 이름이거나, 우리 사회의 안 좋은 단면을 부를 때 호명하는 부정적인 이름이었다.

 

어찌 조선만 그럴까? 어렸을 적 민족에 대해 가졌던 무한한 신뢰 때문인지, 언젠가부터는 오히려 민족이라는 단어가 좋게 들리지 않았다. 저항과 연대의 언어로서의 민족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조선학교 방문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면서도, 어디까지나 내게 민족이라는 것은 차별과 배제의 이름으로서 실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맥락에서도 일본인이, 강자가 이야기하는 민족을 보며 내 확신을 강화하고 있었을 뿐,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에는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모노세키에서 보낸 78일이라는 시간은 짧았고, 사실 친해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의 민족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봉건시대도 아니고, 군사분계선 너머도 아닌 곳에 있는, 시모노세키에서 민족의 다른 층위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시모노세키는 곳곳에서 민족의 다른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 많은 조선인들은 자의로, 타의로, 혹은 강제로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자연스레 일본 사회의 가장 낮은 층위의 노동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모노세키 근교의 우베 장생탄광은 1942년 수몰되어 지금은 바다 위로 콘크리트 환기구 두 개만 남겨두고 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몰된 이 위험한 해저 탄광에서 일하던, 저임금 고위험 노동에 내몰린 최하층 노동자들은 대부분 재일조선인이었다. 이 사고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가 세운 위령비에는 희생된 조선인들의 이름과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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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가난했기에, 부라쿠민 거주지나 일본인들이 살지 않는 구역에 집단으로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시모노세키에도 한때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하는 조선인 마을이 있다. 그곳에는 시모노세키에 단 하나 있는, 해방 전에 세워졌다는 한인교회인 재일본대한기독교회가 조선학교와 5분 거리에 있었다. 잠깐 함께했던 재일조선인 선생님은 재일조선인 커뮤니티 내의 기독교와 조선학교의 거리감을 이야기해주셨는데, 기독교인 조선학교 졸업생을 보신 적이 없다고 말씀해주실 정도로, 한때 그 둘은 거의 양립 불가능한 정체성처럼 받아들여졌다고 하셨다. ‘대한을 칭하는 교회와 조선이 붙은 학교는 이름부터 어떤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념적 거리감도 시모노세키에서는 계급이 구성하는 현실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일까? 조선학교에서는 한인교회의 종탑이 보였다.

 

시모노세키에서의 민족, 조선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와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시모노세키는 민족과 계급이 착종되는 복잡한 현실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나를 호명하는 민족은 어떤 계급으로 나를 결부 짓지 않는 개념이었고, 나는 구태여 생각하려 하지 않으면 민족을 떠올릴 필요가 없는 보편의 안락한 자리에 있었다. 언뜻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듯 보였지만, 시모노세키에서의 코리안은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의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민족을 실천하는지를 느꼈다. 학교에서, 활기 넘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 가운데에서도 아이들은 밝게 자라고 있었다. 조선학교는 사실상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명백한 제도적 차별과 재정적 한계 속에서도, 박봉에도 불구하고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늦게까지 수업을 준비하는 선생님들의 헌신과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노력이 학교를 지탱하고 있었다.

 

동시에 민족학교로서 조선학교는 아이들을 지켜내는 공간인 동시에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민족이 연대의 기초가 되는 모습은, 나로서는 참 생경한, 민족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민족은 재일조선인들의 실천을 통해 내가 느끼던 바와 다르게 의미화되고 있었다. 같은 우리말이 서울에서,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시모노세키에서 모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민족은 이곳에서 공동체를 지켜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같지만 동시에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시모노세키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내가 민족이란 단어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나는 민족의 입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민족은 계급, 국적이라는 차별과 얽힌 현실이기도 했지만, 재일조선인들은 민족을 그 현실에 저항하는 실천으로 삼고 있었다. 민족이 내겐 머릿속 어떤 개념이었지만, 시모노세키에서는 구체적인 맥락의 옷을 입고, 매 순간 변화하는 현실이고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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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단어의 벽 앞에 멈춰 선다. 민족의 한쪽 벽 앞에서 이민자들을 외면하고, 반대쪽 벽 앞에서 재일조선인을 외면한다. 그 벽에 기대서 우리는 때로 환대의 자격을 고민한다. 난민을 종교로, 인종으로 재단하며, ‘각종학교라는 이유를 들어 마스크 지원을 거부하고, 비국민 취급한다. 한편으로는 재일조선인의 차별을 외면하고 체제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소모하며 그 벽을 더 공고하게 쌓아간다.

 

재일조선인들은 조선학교를 세우고, 공동체를 일구며 그 벽을 타고 넘으려 해왔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그 벽을 타고 넘어야 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과 연대하며, 한국에 있는 이민자와 연대하며, 우리도 민족이라는 벽을 타고 넘어 상대방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민족을 배제의 벽으로 삼을지, 타고 올라가 함께할 수 있는 연대의 발판으로 삼을 것인지는 우리의 실천에 달렸음을, 시모노세키의 많은 사람들을 보며 느꼈다.

 

 

정진성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4학년)

예수회 청년 아시아 평화 탐험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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