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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인권연대연구센터 163.♡.183.94
2019.11.11 12:52 8,5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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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슈가 뜨겁다여성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발, 온라인상의 여성 혐오는 심각한 수준이지만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와 현재의 뜨거운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페미니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이동옥 교수는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를 통해 가톨릭 신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느낀 고민들에 대해 풀어놓는다.

 

나는 묵주반지를 끼고 다니는 페미니스트로서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곤 했다.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고, 진보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몇몇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자신도 고민하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종교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성으로서 억압과 혼란, 갈등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 페미니스트 공동체에서 종교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여성 신자들, 특히 내 또래의 여성 신자들이라면 저자가 풀어놓는 이 얘기들에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여성 사제 문제, 마리아를 숭배하나 마르타의 역할을 요구받는 본당 안에서 여성 신자들의 제한적이고 희생적인 역할 문제, 낙태와 생명에 대한 교회의 완고한 입장과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소외되는 여성들의 문제 등에 대해 꼼꼼히 풀어간다.

 

특히 낙태와 둘러싼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 문제는 더 깊은 논의와 사유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낙태뿐만 아니라 인공피임도 허용되지 않으며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더라도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일임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여성의 구체적 삶의 자리를 충분히 보살피지 못하고 당위만을 강조한다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수돼 왔다. 더불어 한국교회는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본당별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펼치며 서명 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교회 장상들의 모습이 다소 부끄러웠다. 낙태가 생명을 죽이는 일이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회의 입장이, 사회법인 형법으로 낙태 한 여성들을 처벌하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저자 또한 낙태하는 여성을 비난하기에 앞서 피임, 낙태, 출산을 위한 의료적 접근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출산 이후 자녀 양육에서 남편과의 분담과 제도적 지원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2016년 낙태법 개정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시위는 보호와 피해의 대상을 넘어서서 성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언급된 논의가 인상적이다.

 

버지니아 헬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생명 감수성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성은 생물학적 특성상 아이와의 관계에서 생명에 대해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론에 따르면 여성의 낙태 결정은 관계를 외면하고 자아와 타아를 분리시키는 이기적인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대해 숙고한 결과다.

 

생명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의 관계를 더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낙태를 선택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궤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낙태 찬성론의 입장에 서 완고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낙태를 선택하기까지의 여성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고려하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나 또한 항상 가져왔던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교회가 낙태죄 폐지 대신 펼치는 운동의 방식이 미혼모 돕기’, 그 가운데도 미혼모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프로젝트인 것도 다소 실망스럽다. 이 캠페인은 이미 미혼모는 용기를 잃고, 희망이 없는 존재일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미혼모는 죄인이라는 시선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태에 대해서도 이미 죄를 지은 자가 어떻게 또 죄를 지을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성을 죄인으로, 살인자로 단죄하는 한 교회는 영원히 상처받은 여성들을 품어내고 태어나지 못한 채 생명을 잃는 태아들을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교회 안의 차별은 여전히 명백하다고 말한다. 물론 변화가 없지는 않다. 여성도 복사를 서고, 미사 전례에서 사회나 독서를 맡기도 한다. 단체장을 맡거나 예비자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신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학을 공부하는 데 제약을 받으며 성직자가 될 수도 없다. 저자는 묻는다.

 

이런 제도 속에서 소녀들이 어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도 여성은 끊임없이 상처 받는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굳은 신앙만으로 교회에 머무를 순 없다. 교회 안에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열정적인 여성들은 결국 교회를 등지고 만다.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는 신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근거도 이것을 차별이라고 보는 여성 신자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최근에는 보편 사제가 관습상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더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이론도 힘을 얻는 것 같다. 이는 나에게는 사제가 되는 게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꼭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보편 사제의 지위와 역할이 어떠한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닐 것이다.

 

세상은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여성, 생명, 성적 자기결정권, 돌봄의 노동 등의 이슈에서 우리 교회는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중이다. 그러나 격렬한 변화의 물결은 곧 교회 전체에도 닥쳐올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을 여성들의 축제, 모든 이의 축제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한다.

 

축제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은 열심히 일하면서 축제에서 소외된다. 여성들을 위한 축제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모든 이가 참여하고 즐기는 축제를 만들 수 있을까. (중략) 예수는 가난한 자들과 아픈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모든 이를 위한 축제를 즐겼다. 이와 같이 여성들의 축제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례와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해방감과 일탈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가부장제에서 억압되었던 여성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정화하며, 상상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여성이 생명력을 얻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출 때만이 여성의 축제이자 모든 이를 위한 축제가 될 수 있다.

 

이 문단에서 축제교회로 바꿔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 여성의 교회, 모든 이를 위한 교회를 위해 더 많은 젊은 여성들과 나이든 여성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젊은 남성들과 나이든 남성들도 책을 읽고 모두를 위한 교회를 만드는 장에 동참한다면 좋겠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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