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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바실 프라이스와 산업문제연구소

정다빈 163.♡.183.94
2019.11.28 12:18 7,9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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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발굴, 바실 프라이스와 산업문제연구소

 

 

선교사로서 바실 프라이스

 

1923년 미국 네브라스카 주에서 태어나 1941년 예수회에 입회한 바실 프라이스 신부님은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초기 선교사 중 한 분입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수련원 시절부터 선교사의 꿈을 갖고 있어 해외에 파견되어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매년 장상에게 피력하였고, 1957년 한국 미션 파견이 결정돼 19571114일 오전 인천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합니다.

 

위스콘신 관구에서 파견된 동료 회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신부님은 서강 그리고 한국 그 자체였습니다. (“Fr. Price for me was Sogang and Korea”, John P. Daly SJ) 더불어 파견됐던 많은 회원들이 한국을 떠나는 가운데서도 신부님은 한국에 파견 받은 선교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했으며, “그분의 한국 미션에 대한 헌신은 완전하고 전면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합니다. (“I was surprised by his firm, clear amd unequivocal call and commitment to Korea. His dedication was complete and total." Christoper A. Spalatin SJ) 무엇보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20046월 사제품 50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후 급격히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짧은 투병생활 끝에 같은 해 9월 선종하셨습니다. 선교사로서 파견된 한국에서 선종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He came back to die in Korea." Christoper A. Spalatin SJ)

 

서강대학 본관 건물 모형을 바라보는 프라이스 신부.png

 

서강 설립의 주역, 40년 간 서강에 헌신한 스승이자 아버지

 

바실 프라이스 신부님은 1960년 첫 수업을 시작한 서강 대학 설립의 주역 가운데 한 분입니다. 1957년부터 게페르트 신부님을 비롯해 이미 파견돼있던 초기 예수회원들과 더불어 서강대학 개교를 위한 준비를 맡았으며 개교 당시부터 사학과 교수로 오랜 세월 미국사와 교회사, 영어 회화 등을 강의했습니다. 1985년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서강대학교 총장보로 봉직했으며 특히 미국 등지의 예수회대학으로 학생들을 파견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 동문회의 해외 연수 장학생 프로그램 서강 펠로우 등 다양한 국제 교류 프로그램의 기초를 확립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제자들의 회고 속에 바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영원한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기억됩니다. 서강대에서 가르친 제자들, 서강 펠로우 프로그램으로 해외에 다녀온 학생들 그리고 제자들의 가족들을 모두 품은 화가(화요 가족)’ 모임을 만들어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함께 공부하고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큰 가족 모임이 되었고 신부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로 화가들을 돌보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후 이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프라이스 신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회고록 물처럼 공기처럼 -프라이스 신부를 말한다를 출간했습니다.

 

회고록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신부님의 모습은 남달리 청빈한 모습입니다. 갈아입을 옷 이상을 지녀 본 적 없는 고집스럽고도 일관된 청빈함을 많은 분들이 회고합니다. 더불어 기억되는 모습은 특유의 겸손입니다. 늘 스스로를 낮추고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먼저 얘기했던 그는 탁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소박한 사람이었지만, 보석 같은 존재로 기억됩니다.

 

사회 정의를 위한 투신

 

바실 프라이스 신부님은 19605월 한국 최초 신용협동조합 출범에 참여하고 19654월에는 KWDC(Korean Welfare Development Committee)를 창립해 바다를 개간해 땅이 없는 농부들에게 나눠주는 사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19666월에는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연구소를 개관해 한국 최초의 노동 문제 연구 및 교육기관을 열게 됩니다. 1970년에는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해 엄혹했던 군사 독재 시절을 관통하는 1988년까지 간사를 맡아 정권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19756월에는 농부들을 위한 교육기관 한국농민교육협의회 KAFE(Korean Association of Farmers Educators) 창립에 참여합니다. 1977년에는 명동노동문제상담소(LCO)를 개소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힘없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이처럼 1960~198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에 응답해 사회 한국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시작을 열었으며, 시대의 불의에 맞서 교회 안의 정의평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정문에서 바라본 산업문제연구소와 메리홀.png


 

산업문제연구소 설립, 어두운 시대에의 응답

 

프라이스 신부님은 1962년부터 한국의 노동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노사 관계도,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 운동도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산업문제연구소가 설립된 배경에는 예수회 차원의 요구도 있었습니다. SELA(Socio-Economic Life in Asis)는 사회사도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당시 총장 얀센 신부님의 요청에 동아시아 지역구 차원에서 응답하기 위해 1959년 설립되었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1962SELA의 일원으로 함께 하게 됩니다. 당시 SELA의 책임자였던 월터 호간 신부님은 프라이스 신부님께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이에 19666월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연구소가 개설됩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자주적이고 책임있는 노동조합만이 한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증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불어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 같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와 대면해야 하고, 이러한 기초를 바꾸는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근원적인 노동 제도와 정책 개선을 위해 교육과 연구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노조임원 및 경영 관리층 인사들을 위한 산업노동관계분야의 교육과 훈련은 산업문제연구소의 가장 큰 사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교육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첫 번째는 3개월 간 180시간으로 구성된 정기야간과정이며 두 번째는 주로 지방노동조합 지도자 교육을 위해 1개월간 숙식을 같이하며 참여하는 180시간 과정입니다. 이 과정동안 참가자들은 연설, 회의진행법, 노동법, 노동조합 조직과 운영, 단체교섭, 국제노동운동, 노동경제, 회계학, 공산주의 비판.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사회원리 및 경영인의 사회적 책임, 사회지도자론, 협동조합론, 신용조합론, 사회보장론 등을 배웠습니다. 산업문제연구소는 이러한 교육과정을 통해 2001년 연구소가 문을 닫기까지 35년 간 노조 임원은 물론 사측 경영인과 정부 공무원, 사회단체 대표 등 1만 여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연구소 역할의 다른 한 축은 노동 분야의 국내외 이론 보급과 노동정책 소개로 대표되는 연구와 자문입니다. 연구소는 산업노동관계연구를 발간하며 노사관계를 둘러싼 해외 이론들을 소개하고, 당시 노동 현실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발간된 산업노동관계연구는 임금결정, 단체협약, 노사협의체 등 당시 시행 중인 제도에 대한 실태조사와 분석, 노동관계법, 개정 근로기준법 등의 법 개정과 제도 개선에 따른 영향력 분석, 서독의 사회보장제도, ILO조약 등 해외사례 및 국제법 분석을 통한 국내 노사환경 개선 방안 등을 주요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산업문제연구소는 20012월 문을 닫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재정적 어려움입니다. 연구소의 재정적 뒷받침은 독일연방정부 해외원조과, 독일주교회의 등 독일에서 지원받은 자금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외국의 재정지원이 끊기자 운영이 어려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90년대 이후 강력한 노동관련 조직과 관련교육기관들이 생겨난 것도 연구소 폐쇄의 이유입니다. 87년 이후의 노사관계는 큰 변화를 맞았으며 프라이스 신부님 또한 산업문제연구소의 역할도 몫을 다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99년 박영기 교수가 은퇴하고(2001년 선종) 프라이스 신부님 또한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연구소의 역할을 변화해 이끌어 갈 후임의 존재도 부재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합니다.

 

산업문제연구소의 성공은 갖은 어려움에도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한 프라이스 신부님의 용기, 시대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할 수 있었던 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가 제한된 여건 가운데서도 교육과 연구 두 분야 모두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소장이자 경영학과 교수였던 박영기, 경제학과 교수였던 김어상 등 서강대학교와 관련학과들, 소속교수들과의 적극적인 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당시 개발도상국인 한국에 대한 독일 정부의 막대한 지원이 아니었다면 연구소 운영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1988년 정년퇴임식.png

 

바실 프라이스 신부님과 산업문제연구소의 유산

 

산업문제연구소는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어려웠던 노동자들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해주는 교육기관이자, 당시로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이론과 연구를 접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었습니다. 산업문제연구소의 교육과 연구는 노동 현장과 사회 현실의 절실한 필요에 귀 기울이며 현장의 현실과 학교 사이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의 투신은 정일우 신부님의 투신과는 그 모습이 달랐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종종 더 깊이 가난한 이들의 삶 속에 자신을 던지지 못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정일우 신부님을 두고 나는 그 사람이 가장 존경스럽고 부럽다고 얘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의 근본 원인에 대한 통찰과 이의 시정이라는 구조적 접근법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산업문제연구소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함께 머무는 예언자적 현존과 근본적 사회구조 변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두 가지 축의 긴장 사이에서 양자의 조화를 보여준 드문 경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891년 발표된 노동문제에 관한 회칙 레룸노바룸(새로운 사태)’ 41번에서 레오 13세 교황은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즉각 수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심각한 상태의 악이 지연으로 인해 치유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장을 읽고 가장 먼저 든 회의적인 생각은 1891년과 달리, 또한 1966년과 달리 2019년 지금 우리가 서있는 세상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정의인지조차 명징하게 식별하기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악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예민한 식별이 먼저일 것이며,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식별에 대한 요구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더불어 우리가 서있는 세상의 다양한 문제들을 근본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 것 역시 절실합니다.

 

산업문제연구소가 폐소를 결정한 2000년 콜벤바흐 당시 총장 신부님은 사회사도직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즘 시대는 예측하기 힘들고 사회 문화적 변화가 너무나 급격해서 징표를 읽기가 쉽지 않고 효과적으로 응답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회에 대한 영감을 주는 비전이나 구조적인 변화를 위한 광범위한 전략은 이제 회의주의에 그 자리를 물려주거나 고작해야 수수한 프로젝트와 제한적인 접근법에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회사도직은 활기와 추진력, 방향성과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산업문제연구소의 연구와 교육을 통해 사회의 기초를 개선해나가는 활동은 인권연대연구센터에 지금 결여된 부분들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2019년 한해 인권연대연구센터의 활동을 돌아보면 연구와 교육보다는 네트워킹과 연대 행사에 많은 역량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와 연대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나 산업문제연구소의 유산은 인권연대의 본질적 미션인 애드보카시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합니다.

 

특히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지적으로 깊이 있게 고민하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사회의 기초를 바꾸기 위한 본질적 노력에 힘 쏟고 있는지 물어오는 것입니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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