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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공동선을 허구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박상훈SJ 121.♡.116.95
2020.07.31 19:24 57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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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작가 랠프 엘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의 화자가 할아버지의 임종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든 공공 영역에서 인종분리를 강제한 짐 크로우 법(1896년부터 1965년까지 실행) 때문에 투표 한 번 해보지 못한 화자에게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말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정치에서 떠나면 절대 안된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화자에게는 수수께끼이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서도 안되는 무력한 사람들, 평생 수모 속에 살았던 이들에게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종차별은 하찮은 피부 색깔 때문에 삶의 결정과 동력이 끊임없이 방해받는 불능의 경험이다. 엘리슨은 이 차별과 분리를 통해 민주주의 어두운 심연이 드러난다고 봤다: 어떤 사람들이 받는 혜택과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희생한다. 

 

무릇 어떤 정치체든 모든 사람의 선익을 확보해야 한다. 민주체제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정치적 결정이 이 사람보다 저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혜택을 덜 받은 사람이 이를 이해해 받아들일 때, 공동체의 안정이 보장된다. 이 희생 때문에 집합적인 민주적 행위가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또다른 진실은,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포기하거나 희생한다는 것이다. 이때 희생은 피해가 된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주권의 담당자로 한껏 끌어 올리면서 동시에 지속적으로 그 주권을 약화하는 심리적 압박을 주는 이상한 종류의 심리-정치체제다.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공동의 심의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비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희생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언어를 갖지 못하고,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낯선 이들로 만든다. 그 방식이 차별과 배제이다. 모든 종류의 차별은 공동체가 차별 받는 당사자에게 자행하는 테러와 같다. 내가 누구가 아니라서, 혹은 내가 누구라서 받는 증오와 혐오는 상실과 분노와 같은 극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나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손상을 끼친다. 이것은 희생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지배와 종속을 견디며 살아 왔다. 분명하게 봐야 할 것은, 우리의 안전과 안락이 타인(낯선 이)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뿐 아니라, 그 희생을 우리가 충분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나 히브리인들에게는 ‘낯선 이를 신실하게 환대하는 삶의 기술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신 혹은 하느님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의무라기보다는 여러 위협에 직면해 공동체의 온전함을 확보하기 위해 습득한 심층의 규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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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 시대에는 낯선 이에게는 말하지 말라가 삶의 준칙이다. 모두가 같은 정치체에 속해 있지만, 다른 권리, 다른 권력, 다른 법 아래 살아간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신화는 우리 모두가 단일성아래 일치하며 통일된 자기정체성을 지니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생각만큼 통일적이거나 단일하지 않다. 동종성同種性과 단일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공포와 함께 간다. 우리 안에 있는 모순이나 이종성異種性수용할 수 없을 때, 타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도 생겨난다. 민족의 유배와 망명의 재난 속에서도 인간의 성스러움을 발견하려 했던 레위기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내국인이면서 동시에 이주민이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너희도 이집트 땅에서는 이방인이었다” (레위기 19: 34).

 

보이지 않는 이들과 함께 호혜의 공동체에서 저마다의 충만한 삶을 이루어 가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게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인권선언> 제1-2조). 그렇다 해도 호혜의 공동체가 차별과 적대의 공동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 선익을 위해라도 시민들은 낯선 이들, 이방인들과 마주하며, 공동의 삶을 회복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어떤 변화이든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것 없이는 시작할 수도 없다. 

 

최근에 정의당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잇달아 <차별금지법안>과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을 발의하거나 제정 요구를 하고 있다. 이미 2007년에 법무부가 입법예고안을 제출했지만, 기업집단과 극우 개신교의 반대로 스무 가지 조항 가운데 일곱 가지의 차별사유 - 적지향, 병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언어, 출신국가, 범죄 및 보호처분 -가 제외되어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반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제안된 <차별금지법안>에는 유엔 인권선언에도 나오고 한국 헌법에도 있는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이들, 낯선 이들이 누구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성별, 장애,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상실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때문에 숨죽여 살며, 실망과 상실 속에 지내는 이들이다. 하나하나가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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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이나 우리 안팎의 다른 모습들과 친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품고 사는 하느님 나라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과 매혹이다. 이를 손에 잡히도록 구체화한 것이 공동선이다. 공동선은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게 하고, 보다 쉽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적 삶의 조건의 총체”(<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26항)라고 하는데, 허튼 트집을 잡아 공동선을 허구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박상훈 신부 (예수회)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댓글목록 1

우소영님의 댓글

우소영 175.♡.87.195 2020.08.13 00:17

부끄럽습니다.가톨릭뉴스에서 이런글을 보다니.
차별금지법에 성분류조항이 있습니다. 남성,여성,그밖에 분류될 수 없는 성. 그것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지요.
분명 가톨릭안에서 동성애는 죄일 텐데요. 죄라고해서 단죄하는것이 아니라 바른길로 인도해야하는것이고요.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고요. 한 형제니까요. 성향자체가 죄가 아니라 행위가 죄인 겁니다. 그 행위를 인정하면 가정은 순식간에 파괴됩니다. 법안은 매우 광범위한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법으로 보호함으로써 사회에,특히 가정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옵니다. 법안을 다시 한번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리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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