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단 한명이면 족하다; 깊어지는 연대와 보조성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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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명이면 족하다; 깊어지는 연대solidarity와 보조성subsidiarity의 원리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는 온 세상을 참으로 공평하게 물들이고 있다. 어느 한 국가, 지역, 집안의 고립된 노력만으로 이 사태에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적 가치인 연대solidarity가 더 이상 고귀한 이들의 낯선 선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외통수의 갈 길이란 게 분명해졌고, 지역과 개인의 자율적 판단을 강조하는 보조성의 원리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의심스럽게 되었다. 모두가 하나의 선택으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의 필요성이 비교적 자명해 보이는 데 반해, 사회교리의 또 다른 기둥인 보조성의 원리는 그 말뜻부터 애매하여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보조성의 원리란 어떤 사회적 결정이 이루어질 때, 그 결정의 주체가 가능하면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여야 한다는 원리다. 이를테면 한 가정 혹은 각 사회 단위의 의사결정은 그 의사결정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는 가정 혹은 사회가 책임지고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한 가정의 법은 그 가정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며, 그 가정에서 밥을 얼마나 먹고 곡물을 얼마나 비축해 둘지는 그 가정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
그러나 이 보조성의 원리는 연대의 원리와 결합할 때 그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쌀을 얼마나 창고에 남겨놓을지는 자신의 결정이지만, 흉년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는 말. 자신의 곡물이니 그걸 창고에 쌓아놓든 먹어 치우든 각 가정의 온전한 자유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공동선에 입각한 연대가 빠진 보조성의 원리를 병든 원리로 이해한다.
여하튼 가톨릭 사회교리는 연대만이 있는 전체주의나 자율만이 있는 극단적 개인주의처럼 각 입장 안에서 명료하게 진지를 구축하며 안주하는 편리함을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교리는 연대와 보조성의 원리가 계속해서 서로를 견제하는 긴장의 여정, 곧 불편함 속에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다른 가정의 상황이 곧바로 내 가정, 내 지역, 내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과연 보조성의 원리가 가능한지 우리는 심각한 질문에 빠진다. 나 혼자, 혹은 내 교회의 결정으로 방역 수칙 따위를 선택적으로 따른다는 건 무책임하다.
그런데 오로지 연대의 필요성만이 유일한 삶의 원리처럼 보이는 지금 이 순간, 역설적으로 보조성의 원리만이 이 모든 연대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 기둥이라는 점을 우리는 발견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초기, 나라와 나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경을 막기 시작했다. 한편에서 보면 보조성의 원리에 부합해 보였다. 그러나 똑같이 극단적인 봉쇄를 선택한 이태리와 대만의 결과가 완전히 상이하고,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엉성한 봉쇄를 선택한 한국과 미국의 상황도 무척 다르다. 소위 국경을 얼마나 단단하게 조이느냐에 대한 각 나라의 선택은 사태 진행의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걸 세상이 금방 알아버렸다. 사태는 나라를 넘나드는 사회 전체의 방역 수준, 곧 적극적 정책까지 내포하는 `사회적 참여`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사회적 참여`가 크고 헐거운 말이긴 하지만 그나마 `국경봉쇄`와 같이 말로는 명료하나, 실제로는 구멍이 많은 정책들보다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구체적으로 염려를 실천에 옮기는 만큼, 곧 책임감 있는 사회적 참여만큼 그 사회 사람들은 덜 죽고 더 넓게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참여 대신, 돈을 찍어 내고, 국경을 풀었다 조이며, 크고 무지막지한 조치들에 의존할수록, 하지만 작고 작은 단위에서 다른 이들에게 무책임할수록 그 사회구성원은 더 많이 죽고, 일상의 회복은 더 요원해지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7월 9일 현재) 이미 삼백만 명이 넘게 코로나 바이러스 보균자로 확진되었고, 하루에 육만 명이 넘게 새롭게 확진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은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라며`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다. 물론 그의 일상이란 사람의 일상이 아니라 돈의 일상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 역시 크고 강한 주장이다. 세상이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희화화하지만,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곧 다수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이며, 세상 어디에나 깊게 뿌리내린 우리의 한 얼굴이다. 그에 반해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들, 극심한 불안 속에서 여전히 견디며, 사회적 염려를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이 또한 우리의 한 얼굴이다. 우린 이 두 얼굴을 오가며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며 풀어지고, 또 하루는 집에 머물며 가슴 조이는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결국 답은 크고 넓은 전 세계적 연대라는 게 확실하지만, 그 성패가 크고 강력한 정책에 달린 게 아니라, 아주 작은 단위, 한 개인의 적극적 실천에 달려 있다니, 참으로 새로운 세상인 것만은 확실하다. 연대는 각 단위의 일상, 매일의 결단, 곧 참다운 보조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벽을 쌓아서 서로가 서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어왔으나 벽은 결국 잠정적인 도구이며 그마저도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 우리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아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국경만이겠는가? 어디 어디를 막아야 한다고 아우성치지만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데 한 명이면 족하다는 걸 모두 경험하고 있다. 덕분에 생생하고 소박한 가르침이 떠오르고 있다. 온 세상이 죽고 사는데 단 한 명이면 족하다. 온 인류가 연대해야 하지만, 그 연대는 작고 작은 단위의 참여에 매달린 한편에선 위태하고, 한편에선 겸손한 호소다. 결국 참 연대란 보조성에 입각하여 단 한명 한명에 달린 원리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다. 그대와 그대가 속한 작은 단위가 하잘것없다며 놀리는 골리앗과 전쟁 중이다.
이근상 시몬 신부
예수회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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