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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4.16에 부쳐 읽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정다빈 163.♡.183.94
2020.04.24 15:09 7,520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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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의 문턱에서, 신앙과 정치를 생각한다. 

 

다시 416일이 지나간다. 어느새 6년이 흘렀고, 스물다섯 대학원 신입생이었던 나도 이제 30대가 되었다. 희생된 아이들이 살아있었더라면 그들 또한 2014년의 내가 머물렀던 삶의 시간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덧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남기고 간 무수한 질문 가운데 어떤 일부도 오롯이 대답해내지 못했다. 무거운 책임감과 미안함은 그대로 남아 온종일 SNS 타임라인은 노란 추모 물결로 채워졌다.

 

동시에 올해 416일은 21대 총선 다음날이었다. 전날 늦은 밤까지 개표방송을 보며 잠들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 개표 현황부터 찾았다. 결과가 확정되는 점심 무렵까지 검색은 이어졌다.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의 여파는 총선에도 닿았다. 추모와 안도,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하루였고, 우리는 어떤 방향이든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난 411일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이 정례브리핑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는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몇 주를 돌아보면, 초현실적이라고 느낄 만큼 일상 구석구석에서부터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은 안정 국면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지금껏 겪은 변화는 단지 시작일뿐임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장 앞에 섰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교회 기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가톨릭 사회교리를 토대로 정의·평화·환경을 위해 일하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일까? 코로나19, n번방, 제주 4·3 72주년, 21대 총선, 세월호 6주기까지, 2월 말부터 오늘까지 거쳐온 시간 속에 가장 깊어진 고민은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세상에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었다.

 

코로나19는 이미 교회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지난 228일 연합뉴스는 대한민국 종교가 멈추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226일 제주와 원주교구까지 모든 교구가 공동체 미사 중단을 발표하며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체 미사를 중단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이 이전과는 다르듯, 교회 또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맞게 될 것이다. 주일 미사참례와 공동체 전례를 통해 확인하던(혹은 확인받던) 나의 느슨한 신앙은 이 위기 속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늪으로 침잠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서,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머물러있는 세월호 이후의 세상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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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통해 다양한 차원의 사랑에 관한 성찰을 제시하고, 이웃 사랑 계명의 구체적 실천에 관해 역설한다. 이 가운데 정의와 사랑에 대해 다룬 26~29항은 정치와 신앙이 만나는 지점에 관해 다룬다. 먼저 회칙 27항은 새로운 사태이후 간추린 사회교리까지 사회교리 회칙들을 제시하며 오늘날의 복합적인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의 영역 밖에서도 유효한 접근법을 제시하는 일련의 기본 지침이 되었다라고 언급한다.

 

물론 회칙은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한다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빠뜨리지 않지만, 동시에 교회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는 구분되지만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명시한다. 특히 국가는 어떻게 하면 지금 여기에서 정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고, 이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훨씬 더 근원적인 물음을 전제로 한다며, 바로 여기서 정치와 신앙이 만나게 된다고 해설한다.

 

회칙은 올바른 국가와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할 임무는 교회의 간접적인 의무라면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도덕적 힘을 일깨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힘이 없으면, 정의로운 체제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9) 더불어 회칙은 교회가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하며, 정의 증진 활동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교회는 정치 생활에서 양심을 형성하도록 돕고, 정의의 참된 요구에 대한 통찰력을 더욱 키우며, 그 요구가 개인의 이익과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도 정의에 따라 기꺼이 행동하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중략) 교회는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28)

 

정의와 사랑에 관한 권고를 마무리하며 회칙은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위한 직접적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속하며, 평신도들은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해야 하는 참여 의무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평신도들의 삶 전체와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의 정치 활동이 언제나 사랑에 젖어 들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29) 베네딕토 16세는 사랑에 관한 자신의 첫 회칙에 이처럼 정의와 사랑, 공동선의 추구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강조한다. 사회 제도가 정의와 도덕을 향한 힘을 잃을 때 교회는 사회와 협력해 그 힘을 일깨울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읽으며, 정의로운 사회 제도를 만드는 나의 의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정체성과 얼마나 교차했는지 돌아보았다. 신앙인으로서 내 자신과 사회 속의 나를 통합하는 것은 늘 큰 과제였다. 대단한 정치참여가 아닌, 스무 살 이후 내 삶에 있었던 몇 번의 선거에서조차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동선을 증진하고 정의와 사랑을 향하는 의무를 충분히 고려한 적이 있었던가.

 

평신도들은 공동선을 증진해야 하는 참여 의무를 거부할 수 없다는 회칙의 권고가 마음을 울린다. 전환의 시대, 신앙은 무엇이며 또한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앞으로 우리의 신앙이 정의로운 사회 제도에 관한 우리의 참여를 더욱 증진할 수 있다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의 정치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적극적으로 교차하고 투영한 것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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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부티지지(Peter Buttigieg)는 지난 31일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하차했지만 유망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동성과 결혼한 동성애자면서 동시에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 성공회 성당에 출석하는 독실한 신앙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성서가 가르친 것을 생각해 보면, 가난한 사람들, 이민자, 이방인, 죄인, 추방자 그리고 사회의 틀밖에 남겨진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은 부와 권력에 대한 숭배입니다. 이것은 성서가 전하는 기독교의 메시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중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일상에서는 익숙한 이야기지만 공적 영역에서 더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당신을 진보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역설하며 소수자의 권리 대변을 자처한다. 정치인 부티지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신앙과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을 투영한 정치가 오히려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이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정치가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기하는 질문이 대체로 그런데 어떻게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느냐?” 수준에 머무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맞이한 전환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현실도, 우리의 교회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갈 수 있기를 상상한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서른 살에 읽는 사회교리'를 주제로 기고 중인 칼럼을 웹진 인연에도 게시합니다. 

원고 본문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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