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봄꽃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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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부작용(side effect)이란 말이 있다. 본래 노리는 목적에 더하여 원치 않는 결과가 생길 때 쓰는 말이다.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부정적 작용이 아니라 부수적 작용이란 말이니 말 자체는 중립적이다. 대부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때론 긍정적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끔찍한 전염병 코로나19가 인류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확하게 정의했듯, 코로나19는 악마다. 사람을 죽이고 있다. 해서 맞서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절박하다. 그러니 이 병의 작용은 그 모든 부작용, 혹여 있다면 있을 긍정적 부작용을 압도한다. 죽어 나가는 이들 곁에서 긍정적 작용을 말하는 짓은 성급하거나 잔인한 일이다. 그러니 부작용은 그저 묻어야 하는가? 병이 지금 자연을 쉬게 한다는 사실, 쉼이란 한가한 이들의 한가한 여유이니 이 급박한 와중에 쉼 따위를 말하는 건, 그저 감상인가?
도시 봉쇄로 매연이 멈춘 지역의 밤하늘에 별이 뜨고, 텔레비전에는 밤에 별을 처음 보았다는 뉴델리 가난한 청년이 나왔다. 그의 큰 눈에 어린 하늘은 한없이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마냥 서글프고 안타깝기에는 너무 맑았다. 그의 고백처럼 일상이 멈춘 많은 곳에서 우린 잃어버린 밤하늘의 별을 다시 발견하고 있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기에, 거대한 공장이 멈춘 것은 공포이지만, 그로 인해 끊임없이 울리던 비명이 멈추었다는 것도, 오랫동안 잊은 불편한 사실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내던지고 떠나버리는 소위 ‘관광’이 멈추었다. 관광도 산업인지라 아우성이고, 오도 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답답하지만, 병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멈출 수 없는 세상인 것도 사실이다. 아무도 의도치 않았으나 인류 전체에게 닥친 막막한 어둠은 좀 멈추라며 오랜 세월 비명을 질러온 자연의 소리에 자리를 내준 셈이다. '삶의 절박함'이 '삶의 쉼'을 들어줄 여유를 압도했을 뿐.
세상이 멈추었고, 자연이, 또 세상 많은 이들이 쉬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불안하다. 여기서 쉼은 부작용일 뿐. 어서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갈망은 여전히 세상 모든 질서를 규정하는 힘이고, 정의다. 질병이 적이란 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치료제도 없는 병은 잔인한 폭력. 반역자. 다 같이 들고 일어나 싸워야 할 적. 그가 가져온 부작용은 그야말로 돌아볼 필요도 없는 따위의 것들.
그런데 십시일반 힘을 모아 이 질병을 몰아내고 다시 일상을 회복하면 우리의 행복은 시작되는가? 병을 이긴 뒤, 치유의 부작용, 부수적 효과로 우린 다시 별을 잃어야 하고, 다시 검은 매연을 뒤집어써야 하는가? 절박하기에? '미친 듯'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라 굳게 믿는 우리의 질주는 건강한가? 어쩌면, 정말 조심스럽게 어쩌면 지금 우리 투쟁이 외려 병든 인간의 호소는 아닌가? 회복해야 할 일상은 과거가 아니라 일상이 멈춘 지금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한가한 소리인가?
벚꽃으로 사람이 모일까 두려워 윤중로를 막아 놓았다. 해서 함께 사는 수사님과 나는 당인리 발전소 옆길로 출근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가득하였다. 나는 감탄하였다. 벚꽃은 마치 하룻밤 새하얀 벼락처럼 등장했다. 옆자리 수사님이 말하였다. “여긴 안 막아도 사람이 하나도 없네.” 사람 하나 없이 흐드러진 벚꽃은 줄줄이 자가 격리 중이었다. "우린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해!" 수사님은 사람들이 꽃보다 결국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꽃을 향해 말할 시간, 꽃의 말을 듣는 시간이 생략된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사실 같다.
‘긴 세월의 성장 뒤에 피워낸 나의 꽃길 아래를 그대가 천천히, 온 마음으로 걸어주기를, 그게 우리 생에 단 한 번 일지라도 포옹의 꽃길이 되고 싶다’는 벚꽃의 호소 따위야 그저 말도 안 되는 감상이다. 허겁지겁 다다라, 서로를 찍어대고, 어깨를 부딪치며, 우르르 몰려가며, 갑자기 우르르 떨어지는 꽃잎에 다 같이 ‘와’하고 경탄하는 삶이란 얼마나 익숙한가. 그게 우리가 이 끔찍한 멈춤의 시간 뒤에 돌아가야 할 일상인가? 아무도 없는 벚꽃을 지난 뒤에야 나는 정말 돌아가야 할 일상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좀 놓아두는 것. 덜 움직이고, 덜 쏟아내는 것. 좀이 쑤셔 어쩌지 못하는 세상의 중독을 이참에 조금, 아주 조금 해독한다면 코로나19는 재앙이면서 선물의 시간이 될 것 같다.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은 작은 병균만이 아니다. 병균이 드러낸 우리의 큰 질병, 여건만 허락한다면 무한대의 재화를 생산해 버릴 기세의 소비의 무한 질주.
일을 줄이고, 빵을 나누는 세상으로, 덜 쓰고, 더 나누는 세상으로 움직여 가면, 꽃들의 말을 우리가 알아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서 와, 좀 쉬시라!’ 아니, 이 말조차 아까울 터. 아무 말도 없이 벚꽃은 몸을 다 털어내며 마치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모든 것을 다 줄 것을. 더도 덜도 없이 담담하게 피워내고, 담담하게 사라져가는 찬란한 벚꽃들의 말들은 가끔은 나무처럼 멈추어 선 이들만이 듣고 나눌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근상 신부(예수회)
예수회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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