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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를 살리는 당신을 살리는 힘

홍찬미 121.♡.226.2
2026.06.08 15:40 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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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일러스트

 

지난 5월 25일에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의 읽기 모임 ‘책 먹는 재주’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책 <비폭력의 힘>을 함께 읽었다.

비록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짧은 감상이라도 글로 정리해 둔다면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리뷰를 쓴다.


나의 안온한 일상 곁으로 전쟁과 살상과 소외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세상이다. 비단 지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묻고 싶다. 왜 어떤 폭력은 명백한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함께 멈춰 세우지 못하는지. 왜 어떤 사람들의 삶은 다른 삶과 같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누군가에겐 당연한 어떤 삶이 어째서 다른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인 건지. 왜 어떤 이들의 삶은 간절하게 지켜지지 않고, 왜 어떤 이들의 죽음은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는 하며 왜.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일은 점점 기적 같은 일이 된 것인지.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맨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렵다.

 

<비폭력의 힘>은 이런 질문들을 안고 폭력과 비폭력을 둘러싼 정치적 공론장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지 정교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폭력의 폐쇄적인 회로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누군가를 비롯해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의 자기는 누구인가?



1. ‘분리될 수 없는’ 너와 나를 위하여


자기(self)는 누구인가.


아마도 이게 내가 <비폭력의 힘>에서 가장 많이 본 문장일 것이다. 질문의 맥락은 누군가가 자기방어나 자기보존을 위한 목적으로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고자 할 때 그가 말하는 ‘자기’란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버틀러는 이 ‘자기’의 윤곽을 다시 풀어쓰면서 너와 나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폭력과 비폭력에 관한 어떠한 윤리적, 정치적 논의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라고 보았다. “둘 사이의 관계가 둘을 근본적으로 정의하는 관계일 때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폭력이 곧 자기에게 가해진 폭력이기도 하다는 말에 의미가 생긴다.”(21쪽)

 

버틀러에 따르면 너와 나를 서로의 관계 밖에서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각각의 ‘자기’가 온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 무의식에는 어떤 망상들이 있다. 그래서 폭력의 순환 구조에 기여하는 갖가지 망상을 정신분석학의 판타지 독법을 사용하여 비판적으로 해석해 내는 것을 버틀러는 이 책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자기는 누구인가’라는 처음의 질문은 ‘지켜질 만한 생명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곧 “애도가치”의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

 

여러 망상이 소개(?)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꽤 강렬했던 부분은 1장 초반부에 ‘홀로 서 있는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자연상태에 관한 가설을 비판하는 대목이었다. “이 장면의 내러티브에 앞서 어떤 절멸이 있었다는 것, 어떤 절멸이 이 장면의 출발점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출발할 때부터 배제당한 상태, 부정당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56쪽) 버틀러는 인간이 애초에 혼자 힘으로 설 수 없이 남에게 맡겨진 존재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세상을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너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비단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것과 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버틀러는 이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생명의 한 속성이라고 언명하며 <비폭력의 힘>에서 다루는 모든 논의의 기본 전제로 삼는다. 2장에서는 서로의 자기가 맞물린 상호의존 관계에서 어떻게 생명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돌보는 윤리적 실천이 가능할지 고민하는데, 특히 각자의 ‘자기’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감행하는 타인을 향한 공격 행위에 도덕철학으로부터 뻗어 나온 어떤 망상이 깃들어 있는지 정신분석학의 이론들과 함께 살펴본다. 이때 상호의존성은 그 자체로 윤리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과 공격성, 동일시와 죄책감 등이 잇따르는 복잡한 심리적 관계로 드러난다(후에 4장에서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충동이론과 전쟁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며 현실의 파괴적 힘들에 맞설 수 있을 가능성 또한 우리의 심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양가감정의 조율(‘자기’-거리두기)과 공격성의 분출(열광)이 폭력정권에 대한 저항의 연대 행위로 집중된다면, 비폭력 투쟁이 공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논의가 이론적으로 설명될 것이라고 보았다).

 

너의 자기와 나의 자기는 맞물려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일까 싶지만, 버틀러의 논조에서는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취약성과 잠재적인 파괴 가능성, 또 심리적으로 모순된 온갖 감정들이 혼합되어 있는 무거운 짐에 더 가깝다. 너와 나는 어째서 이토록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가? 아니, 이러한 관계에 놓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 끝이 열려 있는 투쟁을 위하여


나의 자기가 자주 넘어지는 어떤 장소가 있다. 사람들이 자꾸 사라진다. 폭격으로, 폭행과 학대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외로움으로. 저기에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것이 번번이 부정된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가해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폭력은 공포와 균열과 절망을 주변 모든 것에 새긴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어느 날 최후의 ‘자기’가 주변을 돌아보니 곁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져 있는 것을 볼 것이다(어쩌면 소수의 ‘자기’들은 화성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끝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의 한 축 끝에 있는 것은 절멸이다. 절멸은 우리의 시작이 아니라 끝의 모습이지 않을까.

 

물론 <비폭력의 힘>이 이런 전망을 결론으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지금 나의 나이브함, 나의 판타지(표현을 바꾸면, 반反판타지)를 내보일 용기를 내고 있다.”(63쪽) 버틀러는 책의 전반에서 판타지 독법으로 차례차례 부수어 나간 갖가지 망상들 너머로 생명에 관한 새로운 상상을, 비폭력의 윤리학과 정치학 사이를 잇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계”를 줄곧 가리켜 왔다. “이 책의 한 가지 당위적 희망은, 애도가치의 급진적 평등이라는 정치적 상상계를 정식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100쪽)

 

버틀러는 이 애도가치를 중심으로 하여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나누는 비폭력 투쟁을 제안한다. 즉 단 한 생명도 빠짐없이 애도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살아있을 때 그 삶이 이미 애도가치가 있는 삶으로 지켜질 수 있도록, 그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을 그 삶의 일부로서 지켜낼 수 있도록, ‘자기’와 현실 둘 다의 구조적인 변혁을 꾀하며 투쟁하는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폭력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서로서로 맞물린 이 상호의존성의 생태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생명을 지킬 “전 지구적 의무”를 나눠 감당할 때,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힘(Force)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 “비폭력은 어떤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폭력과의, 그리고 폭력을 막겠다고 하는 힘들과의, 끝이 열려 있는 투쟁이니 말이다.” (78쪽)

 

후기에서 버틀러는 여성살해, 젠더폭력, 난민문제 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저항의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며 취약성과 비폭력 투쟁 사이의 공조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취약성을 취약계층만의 특징 혹은 사회적 배려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상호의존관계를 입증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사건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취약성은 사회관계들을 연결하는 흐름이자 사회관계들을 지지하는 조건이다.’라는 통찰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형태의 실질적 평등을 현실화할 가망은 거의 없다.”(241쪽)

 

요컨대 취약성은 이제 모두의 연대 가능성으로서 재고되어야 한다. 서론의 한 대목에서 버틀러가 생명의 상호의존성에 관해 서로를 묶고 있는 ‘끈’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이 끈은 단지 우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스스로를 보호할 어떠한 무기도 없이 투쟁의 현장에서 맨몸으로 서 있을 때, 공격받고 억류되고 폭행당하며 삶을 존속할 수 없는 장소로 내몰릴 때, 시야에서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힐 때, 당신이 있(었)던 지금 그곳에서 나의 생명 또한 끊어진다. 생명이 살아가고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 묶여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이런 끊어짐으로도 묶여 있다. 우리는 하나하나의 삶을 잇고 있는 끈이다. 나는 당신을 얻음으로써만이 나의 ‘자기’를 지킬 수 있다.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떠올려 본다. 작은 웃음. 포옹. 온화한 날씨. 당신이 무사하다는 소식. 화해한 기억. 소중한 추억. 끼니를 거르지 않고, 생일을 축하하며, 책을 읽을 수 있고, 좋은 음악. 깨끗한 공기. 맑은 물. 돌아갈 집. 고마운 분. 잡은 손. 사랑한다는 말. 도와달라는 신호. 지켜달라는 기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동안에 내가 <비폭력의 힘>으로부터 무엇을 하나 간직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살아갈 이유가 나에게 많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의 일부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일부다. 너는 나의 삶을 함께 감당하여 주고 있다. 서로 다른 삶이지만 결국 하나로 만난다. 나를 살게 하는 당신을 살게 하는 나로, 살아가자. 살아갈 수 있자, 우리.


책의 마지막 문단으로 이 글을 마친다.


‘나’는 ‘당신’이 아니지만, ‘당신’이 없으면 이런 ‘나’를 생각할 수 없다. 당신을 잃으면 세계를 잃게 되고 지속 가능성을 잃게 된다. 우리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든 사랑에 빠져 있든(우리를 잇는 끈이 분노하는 사랑이든 전투적 평화주의든 공격적 비폭력이든 급진적 생존이든), 우리가 그 이어짐을 살아낼 수 있기를,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죽은 이들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기를, 집단행동이라는 험하고 짜증스러운 길, 운명의 그림자길로 다닐지라도, 슬픔과 울분의 한복판에서 생존을 입증/시위할 수 있기를 바라자.(255쪽)

 

 

 

홍찬미 글로리아 (청년사목자·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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