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매거진

image

  

[교회와사회] 성탄, 선물이 되라는 하느님의 초대

조현철SJ 121.♡.226.2
2025.12.22 16:13 127 0

본문

 

웹진 규격 (13).png

 

연희동에 한나책방이라는 작은 책방이 있다. 그곳에서는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 책 이야기(북 토크)’를 하는데, 나도 연이 닿아 지난 10월 말 내 책(<모든 위기는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를 했다. 작지만 오붓한 분위기의 좋은 자리였다. 모임이 끝나자 책방 주인이 봉투를 하나 건넸다. 참석자가 낸 참가비를 모아서 발표자에게 사례비 조로 준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책방 원칙이라는 완강한 기세에 밀려 받아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책 이야기를 하고 사례비를 받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곳 단골인 지인에게 나중에 돌려드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책방에서 연락이 왔다. “반칙을 하셨네요.” 그러면서 돌려받은 사례비로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1년 정기후원을 하겠다고 해서 연락처를 알려드렸다. 얼마 후 꿀잠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나책방에서 주춧돌’ 6개를 후원했다고 했다. 주춧돌 하나는 50만 원이다. 이번에는 책방에서 큰 반칙을 했다. 11책 이야기가 있던 날 겸사겸사 책방에 들려 내가 밭에서 키운 수세미에 고마움을 담아 전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처음부터 주고받은 게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물건이라도, 상품과 선물은 다르다. 상품이 만드는 건 거래 관계, 돈을 주고받으면 바로 끝나는 관계다. 여기에 사람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선물은 다르다. 무상으로 주고받는 선물도 관계를 만든다. 이 관계는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고마운 기억과 함께 이어진다. 이전에 있던 관계라면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더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상품은 싫증 나거나 고장 나면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선물은 다르다. 선물은 준 사람의 마음이 배어 있어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다. 자본주의는 모든 걸 상품화하고 화폐로 환산하여 평가한다. 사람의 노동력도 상품화한다.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노동력을 돈으로 사는 것이다. 임금은 노동력 제공의 대가다. 노동력과 사람은 분리할 수 없으니 노동력을 상품화하면 사람도 상품화된다. 상품 사회에서 사람은 인간적 품성이나 개성이 삭제되고 연봉, 소유한 집과 차와 옷 등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본디 메마르고 삭막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자본주의 사회에 온기가 돈다면 그것은 돈이 오가는 상품이 아니라 정이 오가는 소박한 선물 덕분일 것이다.

 

다시 한 해를 보내며 성탄절을 지낸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성탄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건이다. 이보다 더 귀하고 좋은 선물은 없다. 그런데 세상에 선물로 오신 하느님을 뉠 번듯한 자리가 없었다. 그런 마리아와 요셉의 딱한 처지를 보고 마음이 쓰인 누군가 자기 구유를 내놓았다. 갓난아기에게 더없이 아늑한 보금자리가 된 그 구유는 누군가 하느님께 건넨 소박하지만 소중한 선물이었다. 이렇게 누군가 내민 작은 선물로 갓난아기 예수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자라난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선물이 되었다. 선물은 이어지고 늘어난다.

 

하여, 성탄은 선물이다. 그러니 성탄절이면 선물을 들고 온다는 산타클로스는 단지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기보다 성탄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닐까. 성탄은 우리도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라는, 우리가 가진 구유를 필요한 이에게 내주라는 하느님의 초대다. 그래서 세상을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라는 당부다.

 

꿀잠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역에서 장기간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연대 문화제 꿀잠 이어차를 열었다. 지난해 1218일에는 서면시장번영회지회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부산 서면시장에서, 올해는 지난 19일 현대차 울산공장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이어차를 힘차게 외쳤다. 겨울날 저녁 추위를 뚫고 삼삼오오 모여든 연대자들은 해고노동자들에게 소중한 선물이었다. ‘꿀잠 이어차는 해고노동자들뿐 아니라 거기 모인 모두가 모두에게 선물이 되는 따뜻한 자리였다.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날 거기 성탄이 있었다, 어느 곳보다 충만하게.

 

성탄 시기, 주위를 살피며 절실하게 선물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이들이 보인다. 해고노동자뿐 아니라 인권 침해가 일상인 이주노동자, 힘든 여건에도 땅을 일구는 농민, 이동권이 절실한 장애인, 걸핏하면 혐오의 표적이 되는 성 소수자, 있지만 없는 홈리스가 눈에 들어온다. 시야를 넓히면 폐허 속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사람들이, 개발로 서식처를 잃고 쫓겨나는 비인간 생명체도 보인다. 그렇게 계속 관심을 가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차츰 알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도 세상에 오신 하느님께 구유를 내준 그 누군가가 되어 간다.

 

성탄을 축하합니다.

 

 

조현철 신부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