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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일조선인 김숙자(안나) 선생님 인터뷰 (1)

정다빈 163.♡.183.94
2020.03.12 15:09 7,77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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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학교와 신앙, 표현은 달라도 같은 곳을 향한 두 갈래 사랑의 길 

-재일조선인 김숙자(안나) 선생님 인터뷰-

 

 

김숙자(안나) 선생님은 재일조선인이다. 선생님은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조선학교 교원과 조선신보사 기자를 지낸 동포이자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신앙인이다. 김숙자 선생님은 조선학교를 나온 가톨릭 신자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가톨릭 신앙과 조선학교는 그만큼 재일동포 사회 안에서도 이질적인 두 개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두 갈래의 길은 모두 자신을 더욱 풍부한 사랑으로 이끄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20202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진 김숙자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이 자리에 소개한다.       

 

 

Q.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재일조선인 3세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일본에서 태어났던 2세였고 어머니는 우리말을 하셨지만, 아버지는 우리말을 감각으로만 알고 거의 못 하셨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일본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부터 조선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까지 진학했습니다. 조선대학교 졸업 후에는 조선학교 교원을 8년간, 그 후에는 조선신보사(재일동포들이 발간하는 신문) 기자를 다시 8년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서울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석사 과정을 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남편과 우리학교 풍경이라는 잡지를 격월로 발간했습니다. 지난해 시월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잡지 발간은 중단되었습니다.

 

Q. 중학교까지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부터 조선학교로 진학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A. 우리 집은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자연히 조총련이나 조선학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학생 운동을 하면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열두 형제의 맏이로 대가족이 우리 집에 모두 함께 사는 형편에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려 해도 번번이 반대가 압도적이어서 어렵게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촌들도 결혼하며 집을 떠나면서 우리 형제들이 하나둘 진학할 때마다 본격적인 실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매번 조선학교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조선학교를 악마의 학교’, ‘빨갱이 학교로 부르며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다니던 일본학교 담임선생님의 장인이 재일조선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물론 일본 분이었지만 자기 부인을 보며 오히려 저에게 재일조선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다. 너는 다른 길을 걸으면 어떻겠냐?”고 설득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뜻이 맞아 저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저는 일본학교에서도 학교생활을 아주 즐겁게 했던 편입니다. 학급 반장도 했고, 친구들도 많았고, 선후배들과도 사이가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본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무슨 벌을 받아서 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생활이 즐거운데도 마음 한편에는 무거운 돌을 안고 사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의 설득을 받으며 이 무거운 감정을 조선학교라는 곳에서 해소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 친구들은 무척 반대했어요. 그렇게 폭력적인 학교에는 절대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당시가 바로 영화 박치기의 시대였고, 저는 영화의 배경인 교토 출신이었거든요. 일본 친구들은 이후에도 종종 집에 찾아와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가고, 저를 조선학교에 보내고자 하셨던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시험 기간마다 집을 찾아와서 지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말도 잘 모르는데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겠냐하면서요. 돌아보면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저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모교인 교토 조선학교로 돌아와 교원으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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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시모노세키 노동교육센터 연대의 십자가 앞에서 김숙자 안나 선생님

     

Q. 조선학교와 일본학교를 모두 경험해 본 셈입니다. 일본학교를 떠나 입학한 조선학교는 어떤 학교였습니까?

 

A. 설비가 엉망이었고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것처럼 학생들은 모범생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시스템은 역시 일본학교 쪽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조선학교가 좋았던 것은 또래의 조선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젊은 조선인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주로 보는 조선 사람은 대체로 1세대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 세대와는 문화가 달라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학교에는 같은 세대의 조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달랐습니다. 같은 문화를 가진 친구들과 같이 있다는 것, 이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안심됐습니다. 당시는 조총련 전체에 여러 어려움이 있던 시기여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조선학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께 하느님은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지만, 조선학교가 저를 구원해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조선학교가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Q. 말씀하신 것처럼 천주교 신앙과 조선학교 진학이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동포 사회에서도 드문 존재셨는데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또 재일조선인으로서 두 가지 정체성을 통합해 나가셨습니까?

 

A. 우리 집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었고 저도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어린 나를 깨워 꼭 성당에 데려가고, 아무리 졸려도 기도를 해야만 잠자리에 드는 깊은 신앙심이 깃든 가정이었습니다. 주일학교가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 친구들도 데려가고, 중학생 때는 견진성사도 받으며 정말 열심히 성당에 다녔습니다.

 

당시 교토에는 코리안 가톨릭센터라고 해서 재일조선인들을 위한 성당이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은 일본 신자들이 다니는 본당을 빌려 우리말 미사를 드리는 정도였는데 교토에는 재일조선인 가톨릭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이 독립적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시카고에서 오신 메리놀 선교회 카로 신부님께서 재일조선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 공간을 마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앙 안에 동포들의 귀속의식은 아주 강했고 우리 부모님도 그곳에서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교구 성당을 다니면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센터를 가곤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인 동포들에게 조선학교나 조총련은 완전히 다른 존재, 말하자면 적대세력이었습니다. ‘빨갱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조선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제가 조선학교에 간다는 것은 정말 큰 파문이었습니다. 수녀님이었던 고모는 우리 집을 찾아와 땅을 치고 가기도 했습니다. 삼촌들도 다 신학교를 다녔던 적이 있던 분들이었고 신앙을 떠난 사람에게 아주 엄격한 분위기였습니다. 친척들 사이에서 저는 다른 세계로 간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자연히 저도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을 안 나간다고 해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신앙 안에 머물렀습니다. 성당에 가지 않지만, 삶에서 신앙을 없앨 수는 없는 채로 지내왔습니다. 제가 조선대를 다니고, 조선신보사 기자를 하던 시절에도 사제였던 삼촌은 성서를 보내오기도 하며 저를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교토에서 조선학교 교원을 하던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할머니의 사촌 되셨는데 예전부터 친척들과 가까이 지내던 인연으로 아버지를 문병 오셨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추기경님께서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역사를 알고 있던 저를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까지 편지를 주고받고, 일본에 오시면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해외 순방에도 동행하기도 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곧 성당을 돈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어로 기도를 배우고 다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당에서 멀어지고 떨어지려는 순간마다 나를 끌어 안아주는 손길이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선신보사를 그만두고 결혼하게 된 후에는 역시 재일동포였던 남편이 자신도 세례 성사를 받겠다고 나섰습니다. 저는 추기경님도 우리 집에 오시고 하니 괜히 그런 소릴 하는가싶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반대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하는 게 나는 제일 무서워이렇게 말하면서요. 그런데 남편이 저 몰래 예비자교리를 받고 결국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주일미사를 꼬박꼬박 드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이제는 같이 매 주일 성당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또 제가 어느 날은 하느님께 이런저런 것을 청하는 기도를 했더니 남편이 놀라며 성당은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 놀란 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당신 신자가 되어 좋았어?” 물었더니 남편이 나는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사람이 진짜 신자가 되었구나느꼈습니다. 하느님이 진짜인지 묻고, 의심하고,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선종하게 되고 그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을 찾아 장례미사를 준비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조선학교에 대한 잡지를 만들며 조총련 사회 속에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장례식을 성당에서 하면 작별 인사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당황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신부님께 말씀을 드리니 동포들과 장례를 치르고 후에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해도 괜찮다며 너무 어렵게 생각 말고 남편을 편하게 보내드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재일동포들이 하는 식으로 먼저 장례를 치르고 그 후 가족들과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김숙자 선생님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s://advocacy.jesuit.kr/bbs/board.php?bo_table=webzine&wr_id=36&sca=%EC%9D%B8%EA%B6%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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