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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주변에서 중심을 지키는 법 (전주희 수사 이야기)

정다빈 121.♡.226.2
2025.11.12 13:22 1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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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도직 위원장을 5년 넘게 지냈는데도, 전주희 수사는 자신은 사회사도직의 중심보다는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 서서 활동하는 이들을 지지하며 그 흐름을 지탱해왔다는 점에서, 그는 사회사도직의 활주로를 놓는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사회사도직 일에 온전히 투신했던 시간은 없었음에도, 모두가 그를 사회사도직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선언보다는 태도, 앞장서기보다는 지지로 사회사도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주희 수사의 여정은 주변에서 중심을 지키는 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이 아니라 곁에서

 

민주화의 뜨거운 기억을 품은 세대였기에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정의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민주화, 사회운동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시대였어요. 깊게 참여하든 아니든 다들 관심이 있었죠.”

 

그 역시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회에 입회하게 되면서는 수련 과정에서 만난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고자 평수사로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분을 닮기 위해서라면 사회사도직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늘 행정과 조율, 지원 업무가 맡겨지곤 했다. 본부 사무국장, 학교 상임이사, 본부 재무까지. 현장에 서기보다는 현장을 지원하는 일이 주로 주어졌다.

 

돌아보면 정작 사회사도직 현장에서 직접 일한 적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를 늘 사회사도직 사람으로 봤어요. 한때는 농담처럼 사회사도직의 황태자라고 불렸거든요. (웃음)”

 

사회사도직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늘 다른 곳으로 파견 받아 일해야 했던 전주희 수사는, 그럼에도 현장의 곁을 지키며 함께했다. 사람을 연결하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돕고, 예산의 숨통을 틔우며,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려놓으면서도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렛대를 놓는 역할을 다했다.

 

 

운동과 기관 사이

 

전주희 수사가 오래 붙들어 온 화두는 크게 세 가지다. ‘다음 세대를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운동을 어떻게 대중화할 것인가?’, ‘운동과 기관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처음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동력은 몇몇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의 불꽃에서 시작됐다. 누군가 먼저 나서 불을 붙이면 그 불이 곧 하나의 운동이 되었고,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현장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운동이 지속되려면 결국 기관의 어깨를 빌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연구와 실천을 잇기 위해,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머리역할을 하게 될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가 설립된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예수회원들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대 소장이었던 박문수 신부의 뒤를 이어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을 지내면서 아이시네마테크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단순한 행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문화의 언어로 공동선을 말하며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 사회사도직위원회 운영 역시 흩어진 각자의 운동들이 오래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고자 애썼다.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그는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흐름을 넘어, 한국의 사회운동이 제도 안으로 들어오며 생긴 긴장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기관과 운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운동도 확산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사회사도직이 지속되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운동은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오래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가난

 

지금 전주희 수사가 살고있는 김포에서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은 예전의 도시 빈민과는 조금 다르다. 그에게 지금 여기의 가난에 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방 안에 머물며 사회와의 접점을 잃어가는 젊은 세대다.

 

그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분명히 다문화 사회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양성을 포용하는 힘이 약하다. 이주노동자와 난민, 사회적 고립 청년을 향한 제도적 돌봄과 공적 지원이 충분치 않은 현실 속에서, 그는 섞여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말한다.

 

전주희 수사는 새로운 가난의 얼굴을 돌보는 정치적·사회적 옹호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본다. 사회사도직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것은 곧 환대와 포용의 정치에 대한 요청이다.

 

 

밑거름이 될 용기

 

전주희 수사가 가장 또렷하게 강조하는 것은 세대의 자리바꿈이다. 예수회 사회사도직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젊은 씨앗들을 떠올리며 그는, 이제 사회사도직은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자신들의 세대의 역할은 분명하다. 젊은 사람들 앞에 서서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뒤로 물러나 서포트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자리와 직책을 욕심내지 않고, 2선에서 응원하고 받쳐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젊은이들이 버틸 수 있게 힘을 보태는 것. 그는 이것이야말로 지금 사회사도직 안에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소임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비전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자리와 경로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그는 와서 일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단지 네가 개척해라는 말만 남기고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전하게 착지하고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활주로를 미리 깎아 두는 일. 그는 그것이 자신을 비롯한 우리 세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오래 시선을 두고, 격려하고, 연결하며, 조직 안에서 배움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데 힘을 쏟았다. 사회사도직의 무게를 오래 견뎌온 세대로서, 앞서 나가기보다 밑거름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 물러섬의 미학이야말로, 사회사도직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기 위한 조용한 조건일지 모른다.

 

 

일이 되게 하는 사람

 

학교 일로 지친 끝에 큰 병을 앓았던 시기, 전주희 수사는 스스로의 속도를 다시 조절해야 했다. 가고자 했던 길은 늘 다른 소임에 가려졌고, 세워두었던 계획들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임했다. 괴산 공동체를 드나들며 농민들과 벗이 되어 지내고, 집을 함께 짓고, 김포 공동체에서는 시간이 날 때면 색소폰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섰다.

 

그는 거절해도 결국 맡게 되는 일들을 웃으며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여러 번 우회하면서도 책임을 끝까지 떠안아 온 세월이 묵직하게 배어 있다. 예수회 사회사도직이 강정의 평화운동에 투신했던 시간 또한 그에게는 분명 필요했지만, 동시에 깊은 고민을 남긴 경험으로 남아 있다.

 

카리스마의 힘으로 타오른 운동이 어느 순간부터 좁아지는 것은 아닌지, 운동과 기관, 현장과 연구를 좀 더 유기적으로 엮어 낼 수는 없을지, 그가 붙들고 있는 질문들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두 가지 축이 함께 자라야 한다고 믿는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만남과, 사회적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기획으로 풀어내어 확산시키는 일이다.

 

전주희 수사는 오랫동안, 일이 되도록 뒤에서 손을 보태고 예산의 문턱을 낮추며, 새로 온 이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을 고르는 사람으로 사회사도직과 함께했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좀처럼 과장이 없다. 이제 앞에 서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라고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에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아온 사람의 조용하고도 든든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및 정리: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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