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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공공재생에너지 운동에 바람

조현철SJ 121.♡.226.2
2025.08.18 14:26 5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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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공공재생에너지법 제정 청원5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 소관 위원회에 넘겨지게 되었다. 폭염과 호우가 반복하는 기후재난의 여름에 공공재생에너지 운동에 힘을 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공공재생에너지는 공공부문의 주도로 정의로운 전환을 담보하며 재생에너지를 생산하자는 운동이다. 정의로운 전환은 단계적으로 폐쇄될 석탄발전소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에너지 공공성과 지역의 사회적 생태적 여건을 존중하는 에너지 전환이다.

 

무엇보다 먼저 공공재생에너지법 제정으로 정의로운 재생에너지 생산의 주체가 될 새로운 발전공기업 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공기업이라고 저절로 기업이 되는 건 아니다. 이것은 민간기업인 양 이윤과 효율을 앞세워 비정규직 양산과 위험의 외주화를 방치하는 지금 발전공기업의 실태가 잘 보여준다. 고용과 안전, 인권, 생태와 기후 등 공공의 가치를 좇는 발전공기업이 되려면 소속 노동자와 지역주민, 시민 사회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되는 열린 의결 구조에 기반한 민주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새로운 발전공기업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공공기관과 협력하고 공공성을 추구하는 사회적경제 조직과 주민 참여를 촉진하여 재생에너지를 신속히 확대해야 한다. 햇빛과 바람이 어디에나 있듯이, 재생에너지는 본디 지역 분산형으로 지역 생산과 소비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 지산지소(地産地消)하는 재생에너지라야 에너지 지역 자립을 이루고 장거리 송전의 부작용도 막는다. 이렇게 되어야 더는 지역이 수도권의 에너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에너지 민주주의도 실현된다. ‘재생에너지가 송전탑과 송전선으로 지역주민의 삶과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왕이면 공공재생에너지 운동이 에너지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 누려야 할 공공재가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민영화(실제로는 사유화) 바람으로 사적 이윤의 먹이로 떨어졌다. 돌봄과 보건과 의료, 교육과 주거와 교통을 비롯한 사회적 공공재는 시장의 상품이 되었고, 산과 강과 바다와 갯벌 같은 생태적 공공재는 경기 부양을 노린 개발 대상이 되었다. 자연생태계 훼손, 안전과 효용과 경제성과 관련한 합리적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데도 집요하게 추진되는 설악산과 지리산 케이블카 사업, 새만금 공항과 가덕도 공항 사업 등은 우리 사회의 공공성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 잘 보여준다.

 

삶의 공동 기반인 공공재 이용 원칙은 사회적 이익과 생태적 안정이어야 한다. 공공재를 사적 이윤의 대상으로 바라보면 없던 울타리가 생겨나 이전에 함께 누리던 풍요로움은 줄어들고 희소성은 커진다. ‘로더데일의 역설(Lauderdale Paradox)’로 알려져 있듯이, 사적인 부가 증가하면 공공의 부는 감소한다. 공공재는 공정하고 포용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책임 있게 관리할 공적 기관이 맡아야 한다. 만일 새로운 발전공기업이 공공성을 추구하도록 제대로 설계한다면 공공재생에너지법은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공공재생에너지라고 에너지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햇빛과 바람이 깨끗한 에너지원이라지만, 이 에너지원을 담는 설비는 깨끗하지 않다. 화석연료 발전을 모두 재생에너지 발전으로 대체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하려면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제조에 은, 구리, , 아연, 알루미늄, , 네오디뮴 등 막대한 양의 광물이 필요하다. 광물 추출에는 오염과 자연 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등 심각한 사회적 생태적 비용이 따른다. 추출과 설비 제조과정에서 대량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 저장과 전기차에 필요한 배터리 제조에는 엄청난 양의 리튬이 소요된다. 리튬 1톤 생산에 200만 리터가량의 물이 들어가 지하수 고갈과 수질 오염 등 생태적 교란이 일어난다. 게다가 볼리비아-아르헨티나-칠레가 리튬 트라이앵글로 불리듯이 이런 광물은 대부분 남반구에서 착취적 노동으로 추출된다.

 

오늘날, 세상은 성장이 진보이자 삶의 향상이라고 믿는다. 성장은 정치 성향을 초월하는 이 시대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물질적 과정이다. 성장에 매달리는 한, 재생에너지를 늘린다고 해도 그 효과는 에너지 대체가 아니라 늘어난 에너지 수요를 보충하는 데 그친다. 성장에 고삐를 채우지 않으면 에너지 전환의 효과는 퇴색한다.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에 대비한다며 재생에너지와 함께 핵발전도 늘려야 한다는 궤변이 힘을 얻는다. 에너지 수요가 늘어날수록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에 필요한 광물의 양이 늘어나 추출 방식이 공격적으로 되면서 사회적 생태적 비용이 커진다. 무엇보다 지구의 광물량은 유한하다. 정의로운 전환은 물론 유한한 광물량을 생각하면 재생에너지는 무한정 늘릴 수 없다. 에너지 감축 없이 지구적 정의를 포함하는 정의로운 재생에너지 생산은 불가능하다.

 

공공재생에너지 운동도 결국 성장의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이제 화석연료 에너지는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적은 에너지로도 대체해야 한다는 생태사상가 웬델 베리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성장 신화에서 벗어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성장을 추동하는 자본의 무한 축적 운동에 기반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직시해야 한다.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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