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매거진

image

  

[인터뷰] 휘말린 자리에서, 깊은 곳으로 잠기다 (김정욱 신부)

정다빈 121.♡.226.2
2025.06.23 15:05 137 0

본문

 

 

인터뷰 메인.png

 

어떤 길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걸어지지 않는다. 김정욱 신부에게는 수도자의 삶도, 사회사도직 여정도 그런 길이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보다, 누구를 만났는가가 그를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했다. 입회의 동기도, 해외 선교도, 농촌 생활이나 평화 운동도 언제나 그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내가 발을 담근 게 아니라, 그냥 잠겨버렸죠.”



어두운 시절, 우연히 시작된 수도자의 길 


“인생이 안 풀려서 성당 봉사를 시작했어요. 같이 봉사하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저도 수도회 입회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예수회에 입회했어요. 저는 뭔가 극적인 성소 체험 같은 건 없었어요.”


김정욱 신부는 자신의 수도 여정을 특별한 계기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우연히 시작된 성당 봉사, 그 안에서 만난 수도회 입회를 고민하는 청년들,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해볼까?’ 하는 마음. 그렇게 1988년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지금 돌이켜봐도 그 순간이 신비한 부르심이라기보다 “함께 있음에서 비롯된 전환”이었다고 회고한다.


한편 그 시절은 한국 사회가 광주의 기억을 품고 뜨겁게 요동치던 때였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 사회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여러 형태로 발화되던 1980년대 말, 김정욱 신부는 스스로를 “운동권은 아니었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80년대 청년들이 품은 정의를 향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광주의 진실을 본당에서 처음 마주하고 며칠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간은 “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두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마음 안에 남겼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후 여러 만남과 현장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돌아왔다. 



아프리카에서 마주한 ‘리얼 라이프’, 짐바브웨에서의 리전시


수련기와 철학기를 마친 후, 그는 리전시(실습기)를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보내게 된다. 역시 우연한 만남과 기회들로 이루어진 이 파견이었다.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준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 가면 무언가 깨지고 새롭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막연한 기대만을 품은 채 짐을 쌌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매뉴얼 없는 낯선 삶이었다.


“짐바브웨에 도착하자마자 선배 신부님이 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풍경을 바라보며 그러시더군요. ‘This is real Africa’ 순간, 이게 무슨 소리야?’ 싶었죠.”


짐바브웨의 한 미션 포스트. 말라붙은 땅, 낡은 옷, 최소한의 생필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의 풍경도 사람들도 메말라 있었다. 그는 아무런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미션 지역의 병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병상 정리와 청소부터 시작했다. 남자가 빗자루를 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던 그는 조용히 병원 바닥을 쓸고, 병상의 이불보를 걷어냈다. 


점차 적응하며 그곳에 정착한 난민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새로운 일을 꾸며 보기도 했다. 계획 없이 던져진 자리였지만, 그만큼 자율성이 허용된 공간이었다. “그때 사실 기한도 정하지 않고 갔어요. 그래서 보통 리전시 기간인 2년이 지나고, 또 반년이 더 지났는데 관구에서도 돌아오라는 연락도 없었죠.” 계획도, 역할도, 기한도 없었던 그 시절 그에게 일을 주었던 것은 장상도, 역할도 아닌 사람들과 함께 머문 자리였다. 



뿌리 내림의 시간, 흙과 땀으로 빚은 공동체


보스턴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한동안은 후원회에서 일했다. 한참 후원회원이 늘며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충북 괴산으로 향했다. 정일우 신부님이 일군 농촌 공동체에 머물며 농사를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어쩌면 평생 이곳에서 살지도 모르겠다는 각오로 농장에 뿌리를 내렸다. 함께 공동체에 살던 김성환 신부가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활동했고, 김정욱 신부는 ‘솔뫼농장’에서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그는 솔뫼 농장 사람들과 더불어 수많은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농촌의 노동 강도는 굉장하죠. 11미터짜리 파이프를 어깨에 짊어지고,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파이프에 구멍을 뚫고, 철근을 구부렸어요. 그걸 다 농장회원들이 나서 직접 했거든요. 그렇게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고민을 나누면서 농장 공동체가 더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가 되어갔어요.”


그 시절, 유기농은 지금처럼 몸에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체계화된 산업생태계가 아니었다. ‘생태운동(유기농)’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험이었고, 농촌 곳곳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이들끼리 서로의 이름을 대며 알 정도로 적은 사람들이 실천하는 운동이었다. 괴산의 솔뫼 공동체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생태공동체 사람들, 한살림 생산자와 소비자들, 가톨릭농민회 등 ‘생명운동’과 연결된 이들이 오가며, 세상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같이 농사짓고, 가진 걸 서로 나누며 살았다.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살던 시절 농장에서의 노동은 일상적 생활이면서 동시에 사도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괴산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새로 귀농한 회원들이 농장에 합류하며 구성원의 변화가 여러 방식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회원 개인의 농사가 늘면서 공동작업 병행이 부담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생산한 농산물의 판매가 어려웠을 때는 ‘공동 운명체’라는 정서를 회원들이 공유했다면, 판매와 수입이 안정되면서 점차 회원들 서로를 연결하는 공동체적인 힘은 오히려 약해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강정에서 꿀잠까지, 휘말림의 은총


괴산을 떠나는 일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서강대 교목처의 교목으로 파견되며 서울로 올라와 대학 청년들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정에서의 경험은 그를 사회 운동 현장으로 점차 잠기게 했다. 그때 강정은 미군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한창이었다.


어느 새벽, 동료 예수회원 몇 명과 강정 공사장 입구에 세워진 천막에서 지새우던 밤, 경찰 수천 명이 작은 시골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해산시키는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상황을 겪으며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교목처 근무를 위해 서울에 올라왔지만, 마음은 자꾸 강정을 향했다. 주말이면 틈을 내어 제주를 갔고, 점점 더 깊이 강정의 평화 운동에 스며들게 되었다. 이번에도 기획된 혹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맨몸으로 기지 건설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그를 현장으로 불렀다. 


그렇게 그는 강정에서 7년을 살았다. 강정은 그에게 평화를 위한 투쟁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시금 ‘만남과 관계 가운데 기획 없이 흘러가는 삶과 사도직’에 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계획하고 준비해서 간 것이 아니라, ‘휘말린 자리’에서 그는 가장 격렬한 투쟁의 현장을 지켜보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활동가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그를 용산 참사 미사,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파인텍 고공농성 연대, 콜트 콜텍 해고노동자 투쟁 등 여러 사회 현장으로 이끌었다. 그 모두가 어쩌다 ‘어울리게 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동행이었다. 


비정규직노동자의집 꿀잠과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괴산에서 목수로 일했던 김정욱 신부에게 그 무렵 헌 건물을 매입해 공간 리모델링 중이었던 꿀잠이 조현철 신부를 통해 도움을 청해왔다. 같이 목공을 배웠던 전주희 수사와 3층 거주 공간에 필요한 가구를 마련해 주고, 청소와 페인트칠, 공연실 마루와 입구 데크 공사에 참여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머물 공간을 손수 만들어갔다. 그 시절 함께 땀 흘리며 손수 공간을 만들어 간 이들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가 쌓였다. 함께 흘린 땀이 관계의 바탕이 된 것이다. 도심 한가운데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의 쉼터를 짓는 시간은 그곳을 찾은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기회로 이어졌다. 일손이 필요하면 돕고, 연대가 필요한 현장에 함께하며 그렇게 그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고락을 곁에서 나누었다. 



기획할 수 없는 길, 그저 사람 곁에 머무는 일


“사회사도직이라는 게 기획으로는 될 수가 없다고 봐요. 내가 노동운동을 하겠어! 한다고, 그날부터 하게 되는 그런 일이 아니거든요.” 


돌아보면 그가 걸어온 길도 마찬가지다. 짐바브웨의 병원 바닥, 솔뫼의 비닐하우스, 강정의 천막, 꿀잠의 작업장까지. 어떤 것도 계획된 여정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곳에서 그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현장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예수회의 여러 기록을 관리하는 아카이브실에서 일하는 요즘도 그는 여러 현장의 필요에 응답하며, 새로운 연대의 현장을 찾아 또 다른 인연에 휘말린다. 그러나 그것은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관계에 응답하는 삶일 것이다. 기획할 수 없기에 더욱 충만한 삶. 그 파도 속에서 김정욱 신부는 오늘도 조용히, 사람들 곁에서 헤엄치고 있다. 



 

인터뷰 및 정리: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