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사회] 성찰 없는 진보는 어떻게 차별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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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났다. 지난 12월 3일 뜬금없는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 정확히 6개월 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앞으로도 나라와 사회가 정상이 되려면 가야 할 길이 멀겠지만 어쨌든 한 고개는 넘은 것 같다.
민주정에서 정치는 기본적으로 말로 이루어진다. 현대 민주정의 꽃이라는 선거는 말의 잔치다.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새 판을 짜려는 가장 큰 이벤트가 열렸고 말할 자리도 넘쳐 나니, 할 말 있는 자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제각기 흥미롭다. 거짓을 주장하는 말들이나, 타인을 모욕하는 말들은 나오지 말아야 하는 말들이지만, 그 말들이 나온 배경이나 그 말들이 불러내는 다른 말들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모든 말이 말하는 이에 관한 진실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선 기간 중 쏟아져 나온 말들 가운데 내게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유시민이 김문수의 부인 설난영에 대해 쏟아놓은 말이었다. 투표일을 1주일 정도 앞둔 시점에서 김어준의 팟캐스트 <다스뵈이다>에 출연한 유시민은 그 며칠 전에 노동운동을 부정하고 노조와 노동자를 폄하하는 듯한 발언으로 물의를 켰던 설난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난영 씨는 그때 세진전자라는 그 전자부품회사 회사 노동조합 위원장이었어요. 그러니까 김문수 씨가 대학생 출신 노동자로서 찐 노동자하고 혼인한 거예요. 그러면 그 관계가 어떨지 짐작하실 수 있죠. 김문수 씨는 너무 훌륭한 사람이에요, 설난영 씨가 생각하기에는. 나하고는 균형이 안 맞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원래부터. 그런 남자와의 혼인을 통해서, 내가 좀 더 고양되었고, 그렇게 느낄 수 있겠죠. 자기 남편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기 어려워요, 이런 조건에서는. 그리고 자기 남편이 감옥 들락날락하면서 그거 뒷바라지하러 다니고 구속자 가족으로서 투쟁하고 이렇게 험하게 살다가 국회의원 사모님이 됐죠. 남편을 더욱 우러러보겠죠. 경기도지사 사모님이 됐어요. 더더욱 우러러보겠죠. / 그런데 [남편이] 대통령 후보까지 됐어요. 그러니까 자기 남편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되게 어려워요. 그래서 원래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온 거예요. 이 유력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 배우자라는 자리가. 이 설난영 씨의 인생에서는 거기 갈 수 없는 자리예요.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많은 이가 이 발언을 두고 여성, 고졸자, 노동자를 폄하하는 남성, 지식인, 엘리트의 차별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러자 유시민을 -그리고 민주당 혹은 이재명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어떤 이들은 유시민이 여성, 고졸자, 노동자 일반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설난영이라는 특정 개인을 두고 한 말이며, 그녀의 문제적 발언과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한 말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옳지 못한 변명이다. 유시민의 발언은 특정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음에도 여성, 고졸자, 노동자 일반에 대한 차별적 통념을 바탕으로 한 판단과 비난이며 그러한 차별적 인식의 공개적 재현이다.
유시민 본인은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개인적으로 오래 알고 지낸 인물의 말과 행동을 나름의 ‘내재적 접근법’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내재적 접근법이란 이럴 때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며, 설난영을 ‘내재적 접근법’으로 설명할 권한이나 권리가 그에게는 없다. 어떤 이들은 유시민의 발언이 여성과 노동자를 폄하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 엄중한 대선 과정에서 그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그중에는 유시민이 대선 후보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일개 작가’이니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문재인이 ‘일개 책방 주인’이 아니듯, 정치 이력과 입지를 고려하면 유시민은 ‘일개 작가’가 아니다.
한편으론 계엄 정국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시민이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으니 그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인물일수록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에 걸맞은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많이 들린 말은, 내란 수괴와 그 무리를 심판해야 하는 대선 정국에서 별것 아닌 문제로 민주 진영의 대오를 흩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먹고살기 어렵고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무슨 민주화 운동을 하냐던 옛 독재 정권의 논리와 너무 닮아서 놀랍고도 진부했다.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유시민을 옹호하려는 이들이 오히려 이런 식의 주장을 이어갈 뿐 아니라, 유시민의 발언을 비판하는 이들을 유시민적인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논란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유시민의 발언을 들은 나는 불쾌하다거나 화가 난다기보다는 서글펐고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서글펐던 것은 그의 발언이, 그 어떤 현실 정치의 맥락을 떠나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와 모순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렇게나 똑똑한 사람이, 저렇게나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저렇게나 정의와 합리를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이 저런 차별적 통념을 가지고 있었구나. 우스웠던 것은, 유시민 자신은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얼토당토않게 ‘내재적 접근법’ 같은 말을 써서 스스로를 변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우스웠던 것은 그를 방어하려던 사람들이 그야말로 제각기 서로 모순되는 맥락과 논리를 들이대면서 그에 대한 ‘과도한’ 비판을 멈추라고 했지만, 유시민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유시민적 ‘내재적 접근법’을 시도하면서 인신공격을 퍼부어대 오히려 논란을 과열시켰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말하면서도 자기가 가진 기득권은 그대로 누리고 타자를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아니,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그러한 자기모순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멀리에서나, 가까이에서나 숱하게 봐 왔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차별적인 말이나 행동을 드러냈을 때 느끼는 당혹감과 배신감은 무척이나 아프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본래 매우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어서 한 사람 전체가 모든 면에서 진보적이라든가, 한 사람 전체가 모든 면에서 정의롭고 공평무사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라도 보수적인 면이 있고,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라도 불의한 면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존재로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발언을 변명하는 유시민 자신이나 그의 지지자들은 모순적인 작은 부분 하나를 인정하는 순간, 마치 다른 모든 부분이 그 작은 부분 하나에 점령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온갖 맥락과 논리를 끌어들여 문제의 발언을 변명하거나 방어하려 애썼다. 그러나 사실은 유시민 자신이 나서서 의도와 맥락은 그러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발언이 차별적 통념에 기반한 판단과 비난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 뒤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했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유시민의 발언을 듣고 문득 생각난 것은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최영미와 권인숙의 회고담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다 같이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매번 식사 때마다 식사 준비는 여학생들이 했고, 남학생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양반다리로 앉아서 밥을 먹으면 여학생들은 그 사이에 끼어서 다리를 오므리고 밥을 먹었다는 그런 대목이 기억난다. 그들은 반민주 독재 정부의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면서도 여성을 억압하며 차별했고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운동권 내부의 성차별적 행태를 지적하는 것이 운동권 전체를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거나, 군사 독재정부에 맞서 싸워야 하는 엄중한 상황에서 성차별 같은 부차적 문제를 따지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식의 논리가 작동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시대의 성평등 인식이 전반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노동운동을 했던 박노해는 이미 「이불을 꿰매면서」(1984)라는 시를 통해, 노동 해방을 외치는 자신이 가정에서는 아내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가부장이었음을 고백하고 반성했다.
수도회에 있던 동안에 여러 가지 일로 동료 수사들과 함께 여러 차례 필리핀에 갔던 일도 떠올랐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 인종, 언어의 벽을 넘어 인류 보편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수도회 관구들 사이의 국제적 교류와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으니, 양성 중인 수사들도 아시아 지역에서부터 그러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하기에는 아시아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필리핀만 한 장소가 없었다. 한국 수사들은 필리핀 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현지 주민들의 생활을 체험하기도 했으며, 여러 아시아 국가 수사들이 진행하는 워크샵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수사들끼리 모여 있을 때면 으레 한 수사를 가리켜 ‘너는 필리핀 사람 같다’거나 ‘너는 현지인인 줄 알겠다’며 다들 키득거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종차별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적어도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나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아서 고민을 털어놓곤 하던 형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얼굴이 까매서 그런 거 아니야?’라는 반문이어서 기가 찼다. 그때 그 수사들도 필리핀 사람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차별적인 행동이나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니 인종차별이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예민한 나의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오히려 이런 문제를 제기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는 나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탈리아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서 웃지 않는다는 사실과 웃음이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울 만큼 깊이 내재된 문화와 인식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필리핀 사람을 닮았다는 말만으로 키득거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이다.
그러나 내가 하려는 말은 필리핀 사람 닮았다며 키득거리던 그 수사들이 죄다 위선적인 인종주의자들일 뿐이라는 게 아니다. 밥을 차려 먹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 가부장적이었던 운동권 남학생들도 모두 성차별주의자에 불과했다는 것도 아니다. 김문수의 아내 설난영을 차별적 통념으로 오히려 판단하고 비난한 유시민 또한 알고 보니 지독한 엘리트주의자이며 계급주의자였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싸잡아 비난하는 것 또한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인간 존재의 현실을 무시하는 오류다. 나의 고민은 오히려 그 수사들이 그러함에도 인류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고자 진심으로 애를 썼고 기도했다는 사실과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고자 기꺼이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이며, 유시민 또한 참으로 민주화된 진보적 사회 건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다. 젊었던 날에는 한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이러한 모순을 감당하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그 고민 끝에 이른 결론은 결국 사람이란 그리 일관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매우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인간 존재에 대한 포기를 포장하는 체념은 아니다. 그건 스스로 모순적인 인간에 대한 냉소이자 관용이다. 인간 자체에 대해 냉소하면서 관대해지니, 이전에 참을 수 없던 위선에 대해 더 냉정한 시선을 갖게 되면서도 그것이 그리 괴롭지 않고, 도리어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도 훨씬 수월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기도 더욱 편안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냉소와 관용에만 머물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안의 수많은 ‘나’를 인정하고 돌아보며 끊임없이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는 자기 분열과 모순의 길을 걷다가 심하면 김문수처럼 되거나, 조금 덜하면 유시민처럼 되기 십상이다. 물론 김문수나 유시민처럼 되는 것은 그토록 비대한 자아를 갖고 거짓된 자기 확신에 빠질 만한 위인이거나 엄청난 지식과 지성으로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위인이 될 때나 가능한 일이긴 하다.
지난달에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의 사목 표어가 ‘그분 안에서 하나In Illo Uno Unum’라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의 시편 강해에서 따왔다는 이 구절이 내게는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자기 안의 수많은 ‘나’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하여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살아 있는 동안 요원하기만 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러한 계속적인 일치의 지향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여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성찰하고, 내 안의 수많은 ‘나’들에 대한 지적 앞에서 겸손할 따름이다.
전경훈 하비에르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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