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사회] 교황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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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로 끝나는 마지막 부활대축일 강론은 우리가 다시 새롭게 걸어가야 할 길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유언이 되었다. 지난 12년 동안의 교황직은 ‘다시 시작하는 모든 것’을 따라가려는 여정이었다. 교황은 삶 전체가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우애와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난민과 이주민을 위협으로 여기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외면하며, 환경을 파괴하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며 종교적 신앙마저 값싸게 소비하는 세상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었으며, ‘기쁨과 희망’을 전했다. 교황은 세상의 어두움을 똑바로 응시했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통받는 이들이나 고통을 준 이들 모두에게 손을 내밀었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교황과 목자
교황은 무엇보다 ‘목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하게 살았다. 교황의 리더십은 평범함에서 가장 빛났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친밀하게 만나는 사목적인 은사를 지닌 사람이었다. 사목자의 마음을 교황 직분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이야말로 큰 선물이었다. 거리의 이발소와 신발가게를 찾았고, 소박하게 살며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어울렸던 생활은 교황일 때도 여전했다. 난민들이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달려가 위로했으며, 어느 성 목요일 미사에서는 문신을 한 젊은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단순하고 생생한 언어로 교회를 ‘야전 병원’에 비유했고, 사제들에게는 “양 냄새나는 목자가 돼라”고 말했다. 기도하고 경청하며 상처받은 이들을 만나는 교황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 안의 ‘일치’는 구호가 아니라 생활임을 알게 되었다.
교황의 선물
교황은 세계사적으로 극심한 분열의 시기에 교황직을 맡았다. 세계화와 탈세계화가 교차하고, 곳곳에서 국수주의가 부활하고 포퓰리즘이 확산되며 민주주의는 큰 위기로 내몰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의 교황들이 아니라, 100년 전 교황들이 직면했던 세계와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교황은 처음부터 전 세계와 교회 앞에 놓인 심각한 문제들에 응답했다. 교황이 남긴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교회를 세계적 차원으로 개방하고, 교회의 탈유럽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유럽 바깥에서 나온 교황은 서구 사회정치의 핵심 동력들—식민주의, 자본주의, 군사적 팽창주의—에 대해 논쟁적인 비판을 제기했으며 전쟁 종식, 이주 난민, 핵무기 폐기,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한 노력을 사랑의 정치, 연대의 윤리로 실천했다.
특히 교회를 넘어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지구의 모든 이들’을 향해 ‘하느님의 세상’을 새롭게 수리해야 한다는 긴박한 요청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교황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고, 파괴와 소비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시각의 전환점’을 식별했다. 이 새로운 시선은,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이 상실되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에서 출발해,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했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단어가 ‘회심’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타자의 상처, 지구의 상처에 더 가깝게 다가가, 세상을 위한 ‘상처의 성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교황이 남긴 다른 선물은 ‘쓰고 버리는 문화’에 맞선 강력한 증언이다. 그는 장애인, 수감자, 유아, 노인, 홈리스같이 주변으로 쫓겨난 이들과의 깊은 만남과 동행을 통해, 이런 문화를 직접 반박했다.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를 죽여도 되는가, 누구를 사회에서 버려도 되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제기하며 ‘인간을 쓰레기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시켰다. 교황이 수행한 ‘증언자’의 역할은 분명했다. 신앙의 증언자. 이것이 교황을 포함한 모든 신앙인의 본질이라는 점을 다시 일깨웠다.
교황은 ‘자비’로 넓게 퍼져 있는 열려있는 교회를 바랐다. 교황의 리더십은 결단의 속도가 아니라, 경청의 깊이였다. 하느님의 신비를 앞에 두고 말을 줄였으며, 경계를 허물었고 문을 열었다. 교회는 말하는 교회에서 경청하는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순례하는 교회로, 깨끗한 교회에서 상처입은 교회로, 확신의 교회에서 식별의 교회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이 강조한 것은 성령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사려 깊게 걸어가는 일이었다. 이것이 ‘시노달리타스’로서의 교회에 핵심이었다. 성찰과 대화, 공동책임의 원리에 기초한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교회 운영 방식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이해하게 하는 영성의 언어였다. 교황은 확실성이 아니라 ‘식별’을 택했고, 완결된 교리보다 함께 걷는 신앙 공동체의 개방성을 선택했다. 이 전환이 교도권의 새로운 형태이며, 교회가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이었다.
마지막 인사
교황이 주교 서품 때 선택한 좌우명 ‘자비로이 부르시니’는 우리를 친구로 불러 그분의 사명에 동참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서 그 의미는 존재 전체를 자유롭게 했고 변혁시켰다. 이것이 교황의 신앙과 삶의 핵심이었다. 특히 예수회원들에게 교황은 ‘벗(콤빠녜로)’이었다. 죄인이면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료였다. 교회 잡지에 삼 년 넘게 교황에 관한 연재를 하면서, 교황이 보여준 삶 앞에서 끝없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 덜 두려워하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는 말의 진실을 조금씩 알아 가는 시간이었다.
교황은 사랑 안에서만이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고, 그 사랑 하나면 충분하다는 믿음을 ‘삶의 증언’으로 풀어냈다. 이 사랑은 자신을 넘어서는 용기이며, 고통받는 타인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자각이며, 타인의 혼동 안으로 기껍게 들어가려는 의지였다. 교황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사랑과 연대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 ‘사건’의 시작이다. 교황은 우리가 힘내어 담대하게 살아가도록 그 길을 내주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가장 강력한 현존을 보여준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께 감사드린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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