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지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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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제공 (사진 : 허란)
지난 3월 6일 시청역 부근 삼성 본관 앞에서 ‘고 황유미 18주기 추모 및 반도체 특별법 폐기 결의대회’가 있었다. 집회장 주변에는 반도체 공장에서 직업병으로 사망한 114명의 노동자들의 영정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영정에는 고인의 이름과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적혀있었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의 나이는 20대에서 30대 초반이었다. 참가자들은 이 집회 후에 방진복을 입고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하여 복직을 요구하며 도로에 설치된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있는 세종호텔 고진수 노동자의 고공농성장까지 가서 그날 집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3월 13일, 정부는 반도체 산업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반도체 특별연장근로 인가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경제 발전이고 경쟁력 확보인가?
고 황유미 님은 강원도 속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몇 달 전인 2003년 10월 동기생 10여 명과 함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그리고 입사한 지 불과 2년이 채 안 된 2005년 5월경부터 몸에 멍이 자주 들고 먹은 음식을 토하고 피로와 어지러움을 경험했다. 그는 병원에서 확인한 결과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그는 2006년 10월경 강제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듬해인 2007년 3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강제로 사직서를 제출할 정도였으니 그의 산업재해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유미 님의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 환자가 발생하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삼성의 ‘월드베스트’ 전략에 세뇌되어 ‘삼성의 발전이 나라의 발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이란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광고를 통해서 매우 인간적인 기업 이미지를 선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하고 싶은 좋은 기업으로 ‘삼성’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차단하기 위한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과 삼성 반도체에서 산업재해로 고통당하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은 삼성은 그들이 광고한 좋은 기업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나쁜 기업임을 보여준다.
황유미 님의 아버지 황상기 님은 딸의 억울한 죽음이 산업재해로 판결을 받기 위해 대책위원회와 함께 6년의 긴 법정투쟁을 했다. 황유미 님의 백혈병 발병과 죽음 그리고 산업재해 판결 과정은 2014년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로 개봉됐다.
한편, 정부와 여당은 지난해부터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산업 기업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도적인 지원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법이다. 여당의 이철규 의원은 지난해 11월 11일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반도체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법안의 문제는 반도체 산업 연구개발 노동자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 ‘고임금 노동자’에게는 주 52시간 노동상한제와 초과근로수당 지급 규제를 면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근무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기업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동계는 이 법안이 ‘장시간 노동 체제 복원’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고, 야당은 52시간제 예외를 제외하고 입법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3월 13일 반도체 특별연장근로 인가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은 법정 최대 노동시간인 주당 52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연장근로가 인가되면 주당 64시간의 노동을 3개월 동안 해야 한다. 이 경우 5일 동안 매일 11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고, 하루 더 9시간의 노동을 해야 한다. 하루 11시간의 노동을 할 경우 노동자는 일터에서 12시간 이상을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 두 시간과 취침 시간 8시간을 빼면 하루 24시간 중에 개인이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1-2시간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특별연장근로 기간을 6개월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동은 노동자들 인간 존엄성을 무시한 기계로 취급하는 것이며 비인간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런 비인간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12)
우리 사회는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은 늘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부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은 예이다. 반도체 산업을 최첨단 산업으로 규정했지만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방법은 첨단이 아닌 구태의연하다.
‘통합적 인간 발전’(Integral Human Development)은 가톨릭교회 사회교리의 핵심 개념으로 경제적 성장만이 아닌 포용적 성장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은 나름 인간 복리 증진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 중심적이다. 인간 발전이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 존엄성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유럽의회에서 “인간 존엄성을 증진한다는 것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 누구도 임의로 빼앗길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간 존엄성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손상될 수 없는 가치다. 한 사회에서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면 그 사회를 운영하는 기준은 실용 또는 유용성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인간은 물질적 이득이나 가치에 종속되어 경제 성장, 소비주의나 정치권력의 기능적인 요소로 전락하여 착취의 대상이 된다. 사실 산업재해도, 경제 성장을 둘러싼 노동 인권 착취와 노사 대립도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어 발생하지 않는가. 이제부터라도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통합적인 인간 발전’을 전제로 한 경제발전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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