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정의구현사제단, 순교와 사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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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3일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이날 기념미사를 봉헌하기 전 사제들은 명동성당 지하 경당에 모여 순교자들께 기도했다. 반세기 전, 사제단을 시작한 젊은 사제들도 이 경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었다. 이들을 성당에서 거리로 내보낸 힘은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비상호출’ 때문이었다(창립 50주년 성명서). 어두움과 빛이 교차하는 지하 묘소, 고요한 공간은 200년 전, 50년 전, 그리고 현재가 하나로 묶이며 권력과 자본과 우상과 억압의 희생자들을 ‘하느님의 꿈’으로 이끌고 있었다. 순교와 증언의 장소에 똑바로 서 있으면, 십자가의 허약함 속에 바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사제단은 지난 50년 동안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에 헌신했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사제단의 문제의식’은 신학적 응답과 실천으로 이어져 ‘견고한 도덕성’과 행동의 ‘전투성’으로 사회변혁 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서중석). 정치적 억압과 왜곡은 곧 민중들의 삶의 파탄과 떨어질 수 없는 문제여서, 사제단에게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쫓겨난 이들, 노동자, 농민, 빈민과 함께 하는 일 역시 민주주의 가치만큼 중요했다. 사제들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하는 삶을 기쁨으로 여겼으며, 빈곤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참으로 염려했다. 누구도 이 사랑의 일에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순교자들의 피가 절망과 낙담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희망과 분투를 고무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안에 품고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없는 교회는 예수 없는 교회’라고 말한다. 물론 죽음만이 순교는 아니겠다. 순교자란 복음의 증인이라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피를 흘리는 일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생명의 증인이 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모두가 어려워할 때 사제단은 ‘연대’의 의미를 새롭게 불러냈다. 연대는 무엇을 주어서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고통을 나누면서 타인의 고통에 스며들도록 나 자신을 놔주는 일이다.
연대는 이념이나 전략이 아니라, 복음의 근본적인 인간관이다. 무엇보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사람을 우선에 두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집을 짓는 일이다. 타인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이다. 연대는 그러니 서로돕는 일이다. 이 역동성을 거치며, 무기력과 무력함으로서의 연대가 인간이 되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점도 각성할 수 있었다. 사제단이 앞에 서긴 했지만, 수많은 신앙인, 선의의 시민들, 무엇보다 여성 수도자들이 사제단을 키웠다.
연대의 동반자들이 사제단을 키웠다면, 권력과 자본의 희생자들은 궁극의 신비이신 하느님 앞으로 사제단을 내던졌던 이들이다. 그저 희생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백성’, 이 시대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희생자들은 대상이 아니다. 선전과 홍보 대상이 아니며 자선의 대상도 아니다. 이들은 가려져 있는 실재의 신비함이며, 고통과 하나 되어 계시는 하느님의 현실이다.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농민 반란에서 중상을 입은 농부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의 찢겨나간 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희생자들은 하느님의 성사이다.
세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흐트러지고 망가졌다. 이제 희생자, 동반자, 사제단 앞에는 다시 모으고 회복시켜야 하는 일이 놓여있다. 역사에서 희생자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계가 그토록 낡았기 때문이다. 낡은 세상은 뒤집혀야 한다. 아니라면, 하느님의 현실이 타락한 현실을 압도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는가?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이번 칼럼은 가톨릭평화신문 '시사진단' 코너에도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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