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불법파견,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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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에 일어난 화성의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폭발화재 사고는 ‘사회적’ 참사다. 개인 탓이 아니라 사고의 개연성이 있는 구조나 관행―아리셀은 불법파견―을 사회가 방치해서 일어났기에 ‘사회적’이다. 사회적 참사는 사고가 나도록 방치한 사회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한다. 우리 사회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으니 변화가 없고 사고는 반복한다. 당장 40명이 사망한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와 38명이 사망한 2020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공사장 화재가 떠오른다. 당시에 지목된 문제점은 대략 이렇다. 안전 교육을 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와 방화 셔터를 잠가 놓았다, 화재경보기를 꺼놓았다, 대피로와 방화문을 폐쇄했다. 위험 물질 리튬에 대해 교육하고 정기적인 비상 대피 훈련을 했다면, 대피로가 있었다면, 작업장과 리튬전지 보관 장소를 분리했다면, 아리셀에서 한순간에 23명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사의 뇌관은 모두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이다.
산업재해를 막기 위한 법이 있다.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되었고 1990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전부 개정’되었다. 2021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어렵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법들이 현장, 특히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별로 효과가 없다. 불법파견 탓이 크다. 이를테면, 산업안전보건법 36조는 ‘위험성 평가’에 노동자의 참여를 규정한다. 사업장의 특성을 잘 아는 노사가 함께 위험 요소를 찾아 개선하라는 취지로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사업장의 현실이다. 지역 산업단지에 밀집한 소규모 사업장은 대부분 인력업체에서 일용직 형태로 노동자를 공급받는다. 아리셀은 인력업체 메이셀을 통해서 사람을 썼다. 인력업체는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사람을 모집한다. 메이셀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리셀에 보낸 노동자의 얼굴도 모른다고 했다.
불법파견에 ‘유령노동’이 성행하는 현실 앞에서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일용직이 다수인 사업장에서 위험성 평가에 노동자가 참여한다는 발상은 비현실적이다. 수시로 바뀌는 노동자들에게 안전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아리셀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5~2016년에 일어난 메탄올 실명 사건의 피해자들도 불법파견 노동자였다. 위험성 평가는 사업장의 안전 증진보다는 정부 인증을 받는 요식절차로 전락했다. 아리셀은 지난 3년 연속 안전보건공단의 ‘위험성 평가 우수사업장’ 인증을 받았다. 아리셀 참사는 사업주의 일방적인 위험성 평가가 얼마나 엉터리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 사고에 취약한 구조와 관행을 찾아내 바꾸자는 상식적인 요구다. 아리셀 참사는 겉으로는 폭발화재 사고지만, 근본적으로 불법파견 문제다. 아리셀은 진상을 가리고 ‘김앤장’을 선임하는 등 책임 축소와 자기방어에 바쁘다. 어떻게든 사고를 빨리 마무리하려고 든다. 이런 행태가 또 다른 참사를 예비한다. 불법파견은 ‘불법’이지만 정부는 기업 부담과 관행을 빙자하여 이를 방치해왔다. 불법파견 사업장에 재해가 발생해도 불법파견 자체는 애써 외면했다. 불법파견 정황이 짙은 아리셀이지만, 노동부는 이참에 파견법을 ‘개선’해서 불법파견을 양성화하자는 태도를 보인다. 이건 더 많은 사업장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리셀 참사는 불법파견의 양성화가 아닌 근절을 요구한다.
불법파견이 일상인 사업장은 어떤 법으로도 결코 안전한 일터가 될 수 없다. 노동자의 존재를 지우고 노동력만 빼먹는 사업장에서 위험은 중대재해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사라진다, 다음을 기약하며. 불법파견 노동자는 재해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난다, 대개는 시신으로. 위험은 갈수록 힘없는 사람에게 전가되고, 힘없는 사람은 점점 늘어난다. 아리셀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에 ‘이주’노동자다. 그러나 힘이 없다고,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다. 사업장의 실질적인 안전 보장이 기업 경영에 부담이 된다고 해도 이제는 그 부담을 직접 질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그 부담을 져오지 않았는가. 아리셀 참사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함께 불법파견의 관행을 없애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외주화, 죽음의 이주화를 막아야 한다. 이것만이 참사로 희생된 23명의 고귀한 생명에 우리 사회가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예의다. 불법 파견, 이제 그만! 아리셀 참사의 엄중한 교훈이다.
얼마 전 목포 신항에 있는 세월호를 찾았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윤을 생명보다, 효율을 안전보다 앞세운 잔혹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세월호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고 했다. 몇 년 후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이 있었다. 그때도 코로나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10년, 코로나19도 지나간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제는 이윤보다 생명을, 효율보다 안전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부자 되세요’ 주술에서 벗어났을까? 부두에 뉘어 있던 세월호가 바로 세워진 것처럼 이제 우리 사회도 바로 섰을까? 세상은 여전히 자본이 사람을 갉아먹는 소리로 가득하다.
지난 7월 27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서울역까지 아리셀 희생자 가족 영정 행진이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행진에 함께 한 많은 시민을 보며, 행진을 보고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알려주던 엄마를 보며, 거듭되는 사회적 참사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희망을 만들려 희망버스를 얘기한다. 희망을 나누려 희망버스를 탄다.
조현철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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