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전쟁은 생태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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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언제나 파괴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전쟁이 생태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다. 베트남 전쟁 중 미군이 실시한 ‘랜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은 베트콩 게릴라들의 은신처를 제거하고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고엽제를 살포하는 작전이었다. 이때 주로 사용된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이옥신이라는 유독 물질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는 생태계와 인체에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엽제 살포로 베트남 전역의 식물들이 고사했고, 토양은 오염되었다. 더 나아가 먹이사슬을 통해 독성 물질이 축적되어 다양한 생물종이 위협받았으며, 수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에 걸렸고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 이는 전쟁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폭력을 넘어 생태계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970년, 미국의 식물학자 아서 갈스턴은 베트남에서의 환경 파괴는 단순한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생태계 파괴 행위임을 짚으며 ‘에코사이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에코사이드는 대량 살상과 인종 말살을 의미하는 ‘제노사이드’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전쟁 범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1998년 로마 규정은 ‘자연환경에 대하여 광범위하고 장기간의 중대한 피해를 야기한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의도적으로 행한 공격의 개시’를 전쟁 범죄의 정의에 포함했다. 유럽의회는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취급할 것을 채택하는 법 개정을 진행 중이다. 현대의 전쟁은 더욱 광범위하고 심각한 환경 파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에코사이드를 국제 형사법상의 범죄로 규정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일어난 여러 국제전에서 발생한 폭격으로 인한 산림 파괴, 유독 물질의 유출, 군사 시설 건설로 인한 서식지 파괴는 전쟁이 초래하는 환경 재앙을 증명한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의 대규모 이동은 새로운 지역의 자원 고갈과 환경 약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전쟁 후 재건 과정에서의 무분별한 개발 역시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남겨진 지뢰와 같은 전쟁의 그림자는 오랜 시간 토지의 이용을 제한하고 야생동물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물론 에코사이드를 전쟁 범죄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려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범죄로 에코사이드에 관한 책임을 묻는 일은 아직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학자와 활동가들이 에코사이드를 ‘평화에 대한 범죄’로 보며,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관할하는 중대한 국제 범죄 행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을 감수하며, 환경을 희생하는 결정을 내릴 때 자주 이는 ‘안보’를 위한 결정임이 강조된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환경 파괴야말로 안보를 위협한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기후 변화로 인한 자원 부족과 난민 발생은 새로운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마이클 클레어는 2001년 ‘자원 전쟁(Resource Wars)’이라는 책에서 일찍이 미래의 분쟁은 자원을 둘러싸고 발생할 것이며, 환경 보호가 평화 유지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역시 지속가능한 발전이 평화와 안정의 기초라고 주장하며 환경, 경제,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이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쟁과 환경 파괴의 악순환을 끊고 단순히 전쟁을 멈추는 것을 넘어 생태 회복과 보존을 평화의 필수적인 요소로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9월 16일 일반 알현에서 “우리가 창조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인류에 대한 사랑도 진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2023년 12월 3일 발표한 연설에서는 평화와 창조 질서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며 “전쟁과 분쟁이 환경을 해치고 국가를 분열시키며 지구 보호와 같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고 짚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환경 보호와 인류의 평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평화를 지키고 창조 세계를 보존하는 것은 곧 종교인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매년 더 더워지는 여름, 점점 더 가혹해지는 자연재해 속에 기후 위기의 현실을 마주하는 요즘, 우리는 앞으로 인류가 직면할 가장 큰 위협은 다름 아닌 전 지구적 환경 문제임을 깨닫고 있다. 이러한 환경 재난은 전쟁보다 더 큰 규모의 ‘에코사이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안보의 문제이자 평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이처럼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노력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에코사이드 개념은 단순히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제 활동과 정책 결정도 심각한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곧 에코사이드의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범죄를 넘어 확장된 에코사이드 개념은 우리가 환경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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