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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조창모SJ 163.♡.183.94
2020.02.13 17:26 8,07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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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 주변 작은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느낀 짧은 단상-

 

11년 전 수도회의 첫 서원 후 이사를 온 곳은 서울 강서구의 화곡동에 위치한 연학수사님들의 공동체였다. 알로이시오의 집이란 이름을 가진 그곳은 인근 주택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제법 큰 정원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 내가 예전에 누려보지 못한 작은 사치였던 것 같다. 그곳에 사는 동안 정원담당 소임을 2년 정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서 나무와 꽃, 채소들을 돌보고 키웠다. 다행히도 내가 돌보던 아이들이 잘 자라준 덕분에 같이 살던 공동체의 수사님들과 손님들이 함께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간혹 길옆을 지나가시다가 잠시 멈추어서 정원을 구경하고 가시는 분들, 혹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서 오시고서는 아이들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줄 수 있을지 물어보시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큰 수고는 아니었지만 여러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역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 이후 수 년 간 아현동, 필리핀 마닐라, 제주도를 거쳐서 작년부터는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아루페 공동체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예전 화곡동의 집만큼 크지는 않지만 나름 아담한 크기의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좋은 추억들이 다시금 떠올라서 봄이 오고 날씨가 풀리자마자 양재동 꽃시장에서 꽃과 채소들을 구해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름 공을 들여 땅을 갈고 풀을 멘 공터에다가 가지런히 꽃과 채소들을 심었고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에게서는 예전에 내가 보고 느꼈던 생기나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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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옥상 텃밭에서 키운 오이와 나팔꽃 (사진 조창모 신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자 하나둘씩 시들어 식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살아있는 식물들도 크게 자라거나 많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당연히 예상했어야 했음에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건물의 벽 때문에 일조량이 부족한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원의 흙 역시도 예전에 보았던 검고 부드러운 부식토가 아니라 공사장에서 쉽게 보이는 붉은 모래흙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서 나의 수고나 관심만으로 식물들이 충분히 잘 자라주리라 기대했지만 실상 예전에 그들을 살리고 돌보아 준 것은 따스한 햇살과 기름진 흙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내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다른 변수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뒤뜰은 내가 정성을 들여 가꾼 정원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우리 수사님들의 일과 중 동선과는 떨어져 있어서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곳이었다. 학기말 대청소 중에나 한 번 들릴만한 곳이었는데 지네나 꼽등이 같은 무서운 곤충이 출몰할 것 같은 음산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마태오복음 7장의 말씀처럼 그 문과 길이 비좁아 그리로 찾아드는 일들이 적은 곳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전지작업 후 가지를 옮길 곳을 찾다가 문득 그리로 발을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 자리 잡고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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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옥상에서 자란 채송화 (사진 조창모 신부)

  

그곳에서 자라고 있던 풀들은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잡초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일조량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종들이었겠지만 그 이름 모를 풀들에게서 내가 가꾸던 화초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생명력이 느껴졌다. 바닥의 흙도 정원과는 달리 검은 부식토에 가까웠는데 그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잡초가 자라고 죽음을 반복하면서-길어야 몇 십 년이었겠지만-부식토 층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게다가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번진 듯이 보이는 풀들 역시 그 나름의 질서와 조화로움을 가지고 생장하는 듯이 보였다. 그 군락 속에서 자라고 있던 담쟁이 풀과 나팔꽃들은 땅을 푸르게 덮다 못해서 담벼락마저 푸른 잎사귀와 보랏빛 꽃들로 잠식하는 중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꽃의 영광이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 흙을 곱게 갈아 주거나 잡초를 뽑아 준 것은 고사하고 물 한 번 제대로 주고자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던 이 땅이 실은 생명이 약동하는 건강한 땅으로 변해 있었던 셈이다. ‘찬미받으소서’ 12항에 소개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대기에 의하면 성인은 언제나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손대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어서 그곳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 일화를 어디에선가 읽었을 때는 십일조의 의무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쉽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실상 성인은 이러한 공간을 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맘으로 공간을 가꾸고 생명을 돌볼 수 있는 길을 관상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초대한 것이었음을 조금 더 깊이 맘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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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9월 27일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DMZ 생태평화순례 미사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나의 이러한 작은 깨달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작년 9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의 초청으로 동아시아화해평화 네트워크에서 진행하는 DMZ 생태평화순례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의 분단이란 비극에서 비롯된 현실이지만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비무장지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생물종들이 살아가는 보호가치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그날 우리들을 동반해주신 DMZ 생태연구소장님은 오늘날 나름 깨어있는 의식을 가졌다고 자부하시는 분들마저도 이곳을 경제적 개발가치가 높은 곳으로만 바라보고 계셔서 안타깝게 느낀다고 말씀하셨다.

 

전쟁과 분단의 비극은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불신, 자신의 사상만이 절대적 선이라고 자부하는 맹목적 독선, 그리고 저 편에 있는 자들 역시 나의 형제요, 하느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거부한 죄의 결과물이고 상처일 것이다. 바로 그 아픔의 자리 한복판에서 소리 없이 무심하게 자라나는 풀과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상처의 치유와 생명의 회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 공간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계속 많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아직도 우리나라는 상당히 멀었다고 느껴지지만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으로 생태와 환경에 관한 관심과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임박한 기후위기를 인간의 회심과 노력으로 만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고 보는 비관적 견해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극단적인 비관론까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우리들 문명의 상당 부분이 인간의 이기심과 물욕을 충실히 숭배하는 자연의 경쟁적 개발과 소비에 그 기반을 두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보고되는 이상기후나 좀처럼 누그러질 기세를 보이지 않는 호주와 아마존의 산불처럼 우리들의 맹목적 욕망의 폭주가 종착하게 될 불행한 결말을 경고하는 징조가 연초부터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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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옥상 텃밭에 문득 등장한 새끼 사마귀 (사진 조창모 신부)

 

루카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지금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고 삶의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통장의 잔고나 경제성장률과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가치관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은 부분적인 기술의 개발이나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문제의 근원을 건드리지 못한 체 또 다른 문제만 야기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세상 속 피조물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우리가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깊이 있게 성찰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지난 세기 농업 분야에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던 일본의 농부이자 철학자였던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없으며 오직 자연에 봉사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훌륭한 농부란 쉬지 않고 분주히 일하는 자가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의 힘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중을 들 수 있는 법을 깨달은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실상 우리들 존재의 바탕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발현되는 자연의 생태계이다.

 

인간의 욕심은 스스로를 더 높은 자리에 놓으려다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더욱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위태로이 흔들리는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대는 형국처럼 보인다. 한 단계 더 성숙한 의식을 지닌 인류의 문명은 어떠한 모습일까? 물론 그 구체적인 모습은 몇몇 사람이 아닌 우리들 모두가 고민해야 할 바이고 또 어느 한순간에 시험지의 모범답안처럼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들의 오만함을 내려놓고서 내 주변의 작은 피조물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이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조창모 신부(예수회)

기쁨나눔재단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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