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지나간 시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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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나 전쟁 같은 끔찍한 일은 물론이고,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는 이별과 상실의 사건들, 세상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힌 좌절, 이 모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슬픔과 회한은 단지 과거의 일들이 아니다. 지나 간 과거는 지금의 삶, 그리고 앞으로 올 시간과 안으로 묶여 있다. ‘생각 실험’을 하나 해보자. 예전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안한 것이다. 어느 날 악마가 당신의 가장 깊은 외로움 속으로 몰래 들어와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무수히 더 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영원한 회귀’라고 알려진 이 질문은 내가 살아온 삶의 뜻에 대해 물어보는 실험이다. 만약 지금 같은 삶이 무수히 반복된다면, 나는 그 앞에 서서 어떻게 이 기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그저 잘 될 거라고 상상하는 순진한 낙관이나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비관이나 모두 이 삶의 테스트를 통과할 것 같지는 않다. 삶은 서로 관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련의 행동과 사건의 연쇄가 아니다. 삶은 시간의 두께를 타고 움직이는 어떤 궤적이다. 우리는 그 두께 안에서 살아간다. 개인이든 사회적인 삶이든 그 궤적이 어느 때 단절되거나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때 단절된 것은 삶의 어느 국면이지 전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런 존재로 이끈 과거를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불쾌하고 떠올리기 싫다 해도 그렇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과거를 두고 하릴없이 후회 속에 빠져 살 수는 없다.
그런데, 과거를 꼭 긍정해야 하는가? 아예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고,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의 죽음도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면 훨씬 좋은 것 아닌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비극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의 존재나 사회적 상태를 수용하는 것은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회한과 상실을 다루는 태도로는 저항하는 것보다 수용하는 태도가 더 낫다. 긍정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기회가 왔을 때 기꺼이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만이 남아 있다.
총선이 끝났다. 서로에 대한 ‘원한 감정’이 충돌하며 누가 차악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선거였다. 이런 가운데 흔히 ‘민생’이라 부르는 중요하고 긴급한 사회적, 정치적 삶의 과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권당이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인 대통령이 시민들의 열망에 호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단과 자만 같은 질기고 그늘진 욕구가 대통령 통치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자기도취와 무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누구도 우리의 미래를 어설프게나마 낙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어설픈 낙관과 마찰하는 힘이 ‘희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희망이란 ‘어려운 미래의 선’(bonum futurum arduum)’을 향한 열망이라 불렀다. 희망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느낌이 아니다. 희망은 위험과 곤경을 헤쳐 나가는 방도를 찾아 행동하려는 열망이다. 여기에는 불안한 현실을 바로 보는 맑은 눈과 용기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희망은 무엇보다 좌절하고 실망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들과의 연대와 동반을 통해 거듭나는 기대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염려하시는 ‘작은 이들’의 기대에 어떤 정치이든 응답을 해야만 한다. 몇 년 후 다시 선거가 돌아오면, 그때 우리는 어떤 과거를 불러내야 하는가.
박상훈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이번 칼럼은 가톨릭평화신문 '시사진단' 코너에도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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