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우리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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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생로병사의 과정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천주교회의 수도자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나는 종종 사별로 인한 상실감을 겪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한 지인이 이 세상 삶의 여정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의 부인은 나에게 전화로 그를 위해 병자성사(사제가 사고나 중병, 고령으로 죽음에 임박한 신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도록 기도문을 봉송하면서 기름을 바르는 예식)를 청했다. 나는 그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해 그에게 병자성사를 해 드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가까이 지났을 때 그는 상태가 악화되어 더 큰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그 병원 응급실에는 응급환자가 몰려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어서 그는 다시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며칠을 버티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위중한 상태에 놓이자 그의 딸이 슬퍼하며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병원을 방문해서 가족들과 함께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해드렸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000의 삶에 동반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000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으로 당신의 자비에만 의지해야 하는 가장 취약한 상태로 당신 앞에 있습니다. 000의 이 세상 여정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해 주시고 그를 당신 사랑으로 품어 안아주십시오.” 이 기도 후에 나는 슬퍼하는 그의 자녀들을 따로 만나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점심 즈음에 그의 빈소가 마련될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여전히 그의 부인은 장례절차에 관한 상담을 받고 있었고 대략 오후 한시 정도부터 빈소가 마련되었다. 이는 고인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5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상조회사 직원들은 그들에게 조문객을 맞이할 때 쓸 음식과 용품들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과정이 다분히 일을 처리하는 모습으로 보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족들은 상실감으로 인한 슬픈 마음을 돌보지도 못해, 무엇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도 없었고 타인이 뭐라 말하는 것이 올바로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다.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보다 못해 조문객인 내가 그들이 설명하는 것을 듣고 몇 장의 물품 목록에 사인을 했다. 사실, 유족들 중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상태로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이렇게 넋이 나간 사람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몸을 흔들기도 하고 충격을 주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열을 토하는 유족에게 그만 울라고 권하기도 한다. 상실감에 빠진 사람의 처지를 공감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한편, 고인이 다녔던 성당의 연령회(장례 때 고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장례 예절에 도움을 주는 성당 단체) 회원들이 와서 유족들을 위해서 연도(위령기도)를 해 주었다. 그들은 늘 헌신적이다. 그러나 유족들 중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기도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충분히 애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조문객이 방문했고, 유족들은 그 조문객을 대접하는 일도 해야 했다.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장례 일정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 그 가족들을 만나보았다. 유족들은 고인을 아침에 보내고 황망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오후에 장례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나는 한 지인의 삶의 마지막 순간부터 장례식까지 동반하며 우리 사회에서 장례란 고인의 유족과 친척 그리고 지인들이 갖는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에 공감하는 시간이 아닌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세월호 참사부터 최근 경험한 몇 건의 사회적 참사에서 우리 사회는 애도의 시간도 충분히 갖지 않았고, 피해자 가족들의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에 충분히 공감해 주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는 그저 매우 기능적으로 애도라는 시간을 갖고 마치 일을 처리하듯이 모든 참사를 마무리했다.
문화란 우리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생활양식인데 우리의 문화는 우리를 매우 기능적으로 살게 한다. 이렇게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픈 상황을 일 처리하듯 마무리 짓는 문화 안에서 살면서 우리의 몸 안에 뜨거운 피가 아니라 기계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가 흐르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정서적인 상태와 욕구는 물론 타인의 그런 상황을 인식하고 공감하는 관계적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 문화에서 가능하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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