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강정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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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6일, 강정마을 주민 86명(적지 않은 참석자들이 해군에 의한 금전 약속으로 매수됨)이 모여 제주해군기지 유치를 비민주적으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정마을은 제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강정을 ‘(제)일강정’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3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는 현재, 강정마을에 수년째 살고 있는 나에게는, 내가 들은 그 옛날 살기 좋은 일강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강정마을이 이렇게 된 원인을, 일차적으로는 국가가 제공했다. 국가는 강정마을 주민들 대다수가 반대했던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로 마을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찬반으로 나누어졌고, 심지어 형제와 남매사이에서도 교류가 없고, 지금까지도 결혼식과 장례식 등 마을의 애경사에서 긴장이 흐른다.
2018년 10월 11일 제주 관함식 반대 평화행동 현장 (사진: 참여연대)
2016년 2월에 해군기지가 완공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군기지 건설 찬반으로 인해 생긴 사람들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어 가고 있었는데, 2018년 10월 제주 국제관함식 유치 문제로, 또다시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2017년 12월에, 해군기지 건설 중립 쪽의 사람이 강정마을회장이 되고 난 후부터 국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금전적인 피해 보상에 마을 주민들은 눈이 멀어져 가고 있다.
처음에는 국가가 돈으로 주민들을 갈라놓았고, 이제는 돈으로 주민들의 영혼을 황폐화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강정에서 국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 평화연대자들은, 한 마을을 이렇게 황폐화하고 들어선 해군기지가 국가를 위해서 잘 쓰일 것 이라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의 예상대로, 제주해군기지는 점점 미군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2017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미국 군함은 2018년 제주 국제관함식 때, 미 항공모함이 5천여 명의 미군 병사들을 제주에 쏟아 낼 때 절정에 달했다. 얼마 전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 청해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청해부대의 주력함은 왕건함을 비롯한 4,400톤 이순신 급 구축함 6척이다. 그런데 이 구축함들을 보유하는 곳은 바로 제주해군기지인 해군 제7기동전단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제주해군기지가 미국의 침략전쟁에 일조하는 기지가 된 것이다.
2016년 2월에 해군기지가 완공되기 전후에,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제 해군기지가 건설되었으니, 강정마을에 남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주해군기지는 건설 과정도 비민주적이었고, 건설 목적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국 이후의 국책사업 중에서 가장 많은 반대자들이 체포, 연행, 구속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제주해군기지는 악입니다. 제 신앙은 악을 보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악을 보고, 악이라고 해야 한다고 제 신앙은 저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1주일에 평균 최소한 네 번이나, 구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오전 11시에 사람들과 함께 강정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어서 해군기지 정문 들어가는 구럼비 광장에서 인간띠잇기를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가끔씩은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아침 7시에, 생명평화 백배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100배 절을 합니다”라고 답을 한다.
위와 같은 일상의 평화운동이 수년 동안 지속되다 보니, “이제 해군기지가 건설되었으니, 강정마을에 남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전경 (사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정현진 기자)
강정마을에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가, 천주교 제주교구 신자들, 육지의 천주교 신자들이 중심이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포함하여, 전국의 6천여 명의 건축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2015년 9월에 지어졌다. 센터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여,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님은 나에게 평화학 공부를 권했고, 나는 2016년 7월에 공부하러 아일랜드로 떠났고, 2018년 8월에 돌아와, 2019년 3월에 센터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건축에 기부금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센터 안에 강정 공소의 설립을 위해서 기부를 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강정마을에, 제주도에, 한반도에, 아시아에 평화를 기원하면서 기부를 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센터가 평화건설을 위해서 다목적으로 쓰이기를 원하면서 기부를 했을 것이다. 이외에 또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건축이 확정되고 나서, 강우일 주교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정확히 옮길 수는 없지만 이런 말씀일 것 같다. ‘개인의 삶과 인권이 파괴되든 상관없이, 국가 안보사업이라면 무조건 지지를 해야 한다는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 빠져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평화교육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강우일 주교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2019년 한 해, 센터에서 평화교육을 개설했다. 하지만, 평화는 평화교육만으로 오지 않고, 개인의 내면에 평화가 없이는 세상의 평화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센터에서는 심리치유, 심리상담, 영성 프로그램을 개설했고, 평화영성, 생태영성 프로그램이 진행되도록 대관을 허락했다. 그러면 평화교육, 내적인 프로그램 개설만으로 세상의 평화가 올까?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는 평화운동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나는 아일랜드에서 평화학을 배울 때, 아티클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제목을 얼핏 본 것 같다. ‘평화교육가(평화운동가)는 평화운동가(평화교육가)가 될 수 있는가?’
한때 치열한 전쟁터이었고, 여전히 그 전쟁의 여운이 남아 있는 강정 평화운동 판에서, 교육 기획자로서 또 교육 진행자로서 나는 살아간다. 대한민국에서 운동과 교육, 교육과 운동이 치열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현재의 삶은 실험적인 삶일까?
김성환 신부(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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