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아이들을 보며 평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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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부터 성북구 정릉 근처의 한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다. 이 수녀원의 뜰을 근처 여러 어린이집에 개방하고 나서 아이들이 여기에 자주 찾아온다. 아름드리나무와 예쁜 꽃이 어우러진 뜰은 꽤 넓은 데다 잔디가 깔려 있어 아이들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아이들이 신나게 웃으며 뛰노는 걸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녀원에서 조금 걸어가면 산책할 때 자주 찾는 정릉천이 나온다. 북한산 기슭의 정릉천은 작지만 아기자기하다. 여름이 되니 개울물에 들어가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첨벙첨벙 물고기를 쫓는 아이들, 도시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이 풍경은 얼마나 정겨운지. 모두, 일상의 평화가 주는 선물이다.
지난 5월 31일 아침, 사이렌과 경계경보 문자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잠시 후 잘못 발령되었다는 문자가 왔지만, 이날의 소동은 소소하나 소중한 일상의 평화가 한순간에 깨질 수도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바로 4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북한에서 이웅평 조종사가 전투기를 몰고 내려왔고 수도권에는 ‘실제 상황’이라며 경계경보가 울렸다. 그때 마침 어머니와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전쟁을 직접 겪으신 탓일까 창백하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어머니를 어디로 모시고 가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40년이 지난 오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 갑작스러운 사이렌과 경계경보 문자에 놀란 시민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어디로 피할 것인가.
지난 7월 27일로 정전협정 70년이 지났다. 한국전쟁은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교훈을 남겼다. 정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전쟁의 부재(不在)라는 의미의 평화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선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북한보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한다. 북한의 선의에 기댄 평화는 ‘가짜 평화’로 일축한다. 하지만 힘으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긴장일 뿐이다.
지난 4월 한·미 정상이 ‘워싱턴 선언’을 발표하고 ‘핵 협의 그룹’을 결성하자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미국의 탄도유도탄 핵잠수함이 부산에 들어오자 북한은 단거리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각각 동해와 서해로 날렸다. 한·미가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북한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하자, 북한은 미국 전략핵 잠수함의 부산 기항이 “핵무기 사용 조건에 해당”한다고 받아쳤다. 힘에 의한 평화는 무력시위를 동반한 ‘강 대 강’ 대치 수위를 높일 뿐이다. 이 악순환의 끝은 무엇일까? 평화일까? 그렇게 획득한 평화는 어떤 종류의 평화일까? 필시 긴장과 불안이 늘 감도는 그런 평화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짜 평화다.
함께 살면서 평화를 누리려면 이웃의 선의는 필수다. 그래서 선린, 좋은 이웃을 얻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좋은 이웃을 얻는 비결은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다. 힘과 대결이 아니라 선린과 공존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상대를 밀어붙일 게 아니라 보듬어 안아야 평화의 길이 열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이 먼저 대승적으로 나가야 일본이 움직인다며 일제 강제노동에 관한 대법원 판결과 피해 당사자의 의견,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일본 정부를 감싼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30년 이상 바다에 버리겠다는 일본 정부를 알아서 대변한다. 그런데 왜 북한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힘으로만 몰아세우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힘을 키우되 상대의 적의까지 키울 필요는 없다. 현 정부 들어서 가치 외교와 한·미·일 동맹 강화 등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하는 행보는 활발하지만, 긴장 완화의 노력은 찾기 어렵다. 통일부는 ‘북한 지원부’가 아니라는 대통령의 비판을 북한은 어떤 의도로 받아들일까. 지난해 내놓은 ‘담대한 구상’이 제안이 되려면 거기에 상대가 받을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 일방적인 요구는 제안이 아니라 지시다. 협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일방적인 제안은 담대할수록 위험하다.
정전 70년, 그동안 이 땅의 현실은 어떻게 변했는가? 평화가 아니라 긴장만 키우지 않았는가. 극심한 대립의 땅에 평화를 심으려 ‘종전 선언’을 외친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는 정권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화인가 대결인가? 평화는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할 수 없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는 외쳤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칼과 창은 생명을 없애는 무기요 보습과 낫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다. 평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해맑게 웃고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이 땅의 평화를 생각한다. 당신은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프란치스코 교황)
조현철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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