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사회적 낙인과 한 건설노동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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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가끔 키를 뒤집어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받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곤 했다. 밤에 잠을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지려서 그의 부모가 교육 차원에서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런 수치를 당한 아이는 그 수치스러움을 다시 당하지 않으려고 그 집단이 요구하는 규범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된다. 벌을 주는 방식 치고는 매우 수치스러움을 안기는 방식이어서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바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적 척도로 사회적 명예와 존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존경받고 싶은 열망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적 인정에 끊임없이 의존한다. 경직된 사회 또는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다면 사회 규범과 기득권자들의 요구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경직된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낙인을 이용하여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사회적 수치심을 갖게 한다. 이 사회적 수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는 우리의 승인과 보호 없이 여기에서 살 수 없어!” 심한 경우 이 사회적 수치의 메시지는 종종 혐오와 배제의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좌익 용공세력’, ‘종북주의자’ 그리고 ‘빨갱이’라고 사회적 낙인을 찍어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불이익을 주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런 비열한 방식의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사회적 수치로 치를 떨었고, 지금도 여전히 정치권력가들이 휘두르는 사회적 낙인이라는 위협에 많은 시민들이 자기 검열을 하며 공포에 떨고 있다.
최근 건설 현장에는 “「건설현장 갈취·폭력 등 조직적 불법행위」 정부합동 특별단속 실시”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리고 주 내용 밑에 “국토교통부 ※중점단속 대상: 채용강요, 기계 사용강요, 금품강요, 업무방해, 폭력, 갈취, 불법집회, 보복행위 등”이라고 써진 것으로 봐서 정부에서 내걸은 현수막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마치 건설 노동자들을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로 간주하며 이들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위협이고 선전포고로 보인다. 사실 지난해 12월부터 경찰청은 ‘건설현장 갈취·폭력 등 조직적 불법행위’ 특별단속 추진 계획을 발표했고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한 집중단속에 50명 특진을 배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건설노동자 천여 명이 경찰과 검찰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공안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1일 건설노동자 양회동 님이 분신했다. 그는 조합원 채용과 노조 전임자 인건비를 요구한 혐의로 경찰로부터 수사를 받았고,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둔 지난 1일 강릉시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분신했다. 그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이튿날 숨졌다. 그는 분신 전에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네요.”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야당 대표들에게 손 편지 형식의 유서도 남겼다. 그 유서에는 검찰과 경찰이 자신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불법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호소했다.
분신한 양회동 노동자는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다고 했다. 사실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서 적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었으며, 휴일을 보장받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산업재해를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검경이 건설노조를 ‘건폭’이라는 표현하며 건설노조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찍은 것은 검경의 조사를 받은 노동자를 포함하여 모든 건설 노동자에게 치욕감을 안겼다. 이 치욕스러운 감정은 창피함이라는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인한 억울함이 혼합된 그런 감정이다.
수치심이란 자신의 부족함과 취약함이 드러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즉 그런 부족함과 취약함으로 인해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이 올라오면 부족함과 취약함을 감추려 한다.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과 자기보다 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려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존감을 상실한다. 사실 경직된 사회 구조에 적응한 많은 사람들이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취약함을 숨기고 사회규범과 기득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산다. 그래서 경직된 사회구조의 한 형태인 권위주의는 권위적인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지 않고 권위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많은 피해자들에 의해서 더더욱 견고하게 구축된다.
그러나 치욕이란 감정은 좀 다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치욕이라는 감정을 타인이 자신의 어떤 행동을 비난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내면에 올라오는 슬픈 감정이라고 했다. 경찰은 건설노동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업무방해 및 공갈로 규정했다. 이것이 건설노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인간은 자신의 자존심이 좌절되면 치욕감에 몸을 떤다. 그리고 이 치욕을 푸는 방법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치욕을 안긴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저항한다. 건설노동자 양회동은 저항으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이는 안타까운 죽음이다.
나는 공권력이 비열한 방식으로 건설노동조합에 사회적 낙인을 찍고 치욕감을 주어 양회동 건설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본다. 그러므로 정부는 건설노동조합에 대해 ‘건폭’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수치와 치욕을 준 것에 사과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자존심이 좌절되어 치욕감을 느끼는 많은 건설노동자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 저항이 중요한 이유는 자존심이 좌절된 채 삶을 유지하는 것은 자존감 없는 비굴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올바로 대하기 위해서도 나의 자존심을 짓밟는 공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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