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상처가 아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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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동우 동국제강 하청 노동자는 산업재해로 38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부인은 임신한 상태였다. 그는 몇 달 후에 태어날 아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불행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회사 측에서는 사망 8일이 지나서야 공동대표이사 중의 한 명만 빈소를 방문했다 한다. 그들에게 노동자, 그것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결국 회사와 유족 사이의 합의는 거의 3개월 후인 6월 16일에 겨우 이루어졌고 6월 18일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이동우 노동자의 산재 사망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국가는 제도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책임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물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재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그런데 검찰은 이 사건이 발생하고 8개월이 지났음에도 책임자를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이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우려하며 검찰의 이런 모습 또한 의도적인 행위로 해석하고 분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검찰의 행태와 가해자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로 인해서 유족들의 억울함과 고통은 더 깊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동국제강 산재사망사고 지원모임’은 지난 11월 30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검찰에게 ‘고 이동우 동국제강 비정규직 노동자 산재사망사고’와 관련하여 동국제강과 실질적인 소유자이며 경영 책임자인 장세욱 대표이사를 기소하라고 촉구했다. 용서와 화해를 강조해야 하는 천주교회의 사제가 사고 책임자에 대한 응징을 요구한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올해 1월 27일부터 시행되었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정책자료’에 올라온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 목적은 “기업의 안전보호조치를 강화하고, 안전투자를 확대하여 중대산업재해를 예방, 종사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산업재해 사망자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노동건강연대’에서 매달 산정하는 ‘이달의 살인기업’ 코너가 밝힌 작년 재해로 사망한 노동자 수는 814명이다. 그런데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산재 사망자 수는 550명으로 연말 기준으로 환산할 때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참혹한 산업재해가 반복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 사회는 문화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는 삶의 가치로서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고 짊어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을 생존이라고 가르쳤고,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게 했으며, 삶을 위계적으로 단순히 성공과 실패로 나누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 예를 들어, 의식주가 모두 노동을 통해서 창출되지만 우리는 노동이란 천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이런 시각에서는 노동자는 곧 실패한 사람이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했고, 이기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쁨은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문화에서 우리는 공감을 통한 상호지지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로 개별화되어 떠도는 부초처럼 존재한다. 문제는 문화는 법을 해석하는 코드가 되기에, 이와 같은 문화적 천박함이 사회적 약자들이 온당한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참사는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진리이다. 우리 사회가 참사를 기억하지 않기에 산업재해와 같은 참사는 줄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산업재해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게 시작이다. 또한 기억은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실 중대재해처벌법은 김용균 청년 노동자의 죽음과 맞바꾼 법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들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법보다 더 엄하게 경영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을 원했다. 그래야 참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은 보완 개선되어야 하며, 개악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천주교회의 사제로서 사람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화해Reconciliation’란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당사자를 ‘다시 함께 있도록 부르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갈등과 상처는 가해자가 용서를 청하고 피해자가 용서함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진다. 용서는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사회적 구조로 인한 피해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차원의 화해가 필요하고, 이는 정의에 입각하여 ‘올바른 관계의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차원의 화해를 위해서 두 당사자는 상호적 관계를 바탕으로 그 피해를 확인하고 그 아픔을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교환적 정의Commutative Justice). 그리고 이미 자행한 부당함에 대해서 보상해야 한다(보상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산업재해 피해자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화해는 ‘교환적 정의’부터 성립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은 ‘회복적 정의’를 위한 장치가 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문화적 코드가 천박한 까닭에 같은 산재가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용서와 관련하여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용서란 어떤 범죄에 대한 관용도, 피해에 대한 망각도 아니다. 또 불의를 고발하는 것이 증오가 아니다. 나는 사제로서 두 당사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특히 피해자에게 과거의 피해에 대해서 잊거나 그 피해에 대해서 가해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사실 용서는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설령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아픈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난 상처가 아물어도 그 부위에 충격이 가해지면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피해자들의 상처도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처로 남아 아픔을 간직한다. 이 상처가 아물어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용서를 하게 되면 미래의 아픔을 줄여나갈 수 있다. 결국 용서란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가해자의 과거의 행위와 피해자의 미래의 아픔이 개선되도록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가해자가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행위는 용서받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과거의 아픔뿐만 아니라 미래의 아픔도 온전히 져야 한다. 피해자가 미래의 아픔을 겪도록 방치하는 것은 2차 가해이다. 같은 재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피해자들의 미래의 아픔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산재 사건의 책임자들에게 그 책임을 엄하게 물어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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