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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내가 ‘노란봉투법’의 제정을 바라는 이유

김정대SJ 223.♡.212.216
2022.10.05 18:54 1,765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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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동계와 종교, 시민단체가 함께 노동조합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고,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법 개정 운동을 선포했고,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과 함께 노동조합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노란봉투법을 발의했다. 이는 노동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위한 당연한 요구이다.

 

사용자들은 오래 전부터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 임금과 재산을 압류하는 손배가압류라는 무기를 사용해 왔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와 2012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는 손배가압류로 인한 고통을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2009년 회사의 구조조정에 맞서 파업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에게 사측은 47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노동자들의 재산과 임금이 가압류되었다. 그리고 불과 3~4년 사이에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들 25명이 이 손배가압류 때문에 얻은 생활고와 병마로 숨을 거두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남은 가족들은 여전히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이 손배가압류는 마치 유령처럼 떠돌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목숨을 노렸고 삶을 파괴해 버렸다. 자본은 피도 눈물도 온기도 없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인정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시작한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47억 원을 갚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편지와 함께 전한 47천 원에 관한 소식이 알려지며 노란봉투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노란봉투 캠페인이 시작되고 거의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손배가압류란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에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이유로 470억 원의 손배가압류가 청구되었다.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에게도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피해액을 보상하라며 27억 원의 손배소를 걸었다.

 

노동자들은 너무나 살기 힘들어 살아보려고 파업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엄청난 액수의 손배가압류였다. 노동자들은 이 손배가압류가 죽으라는 메시지라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손배가압류가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가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 손해배상 재판을 걸고 노동자의 재산과 임금에 대해 가압류를 하는 것도 노동조합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렇게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는 너무도 쉽게 무시된다.

 

노동자와 사용자와의 관계는 계약관계이지만 다분히 권력관계이다. 이 권력관계에서 약자는 당연히 노동자이다. 약자인 개별 노동자는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없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의 일방적 권력행사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자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들의 단결권을 인정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적극 권장한다. 또 교회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지지한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상대 집단 특히 고용주들에게 대항하는 최종 수단으로서 파업 또는 작업 중지가 있다. 이 방법은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 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따라서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여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0)

 

가톨릭교회는 파업이 합법적인 수단이지만 동시에 어떤 맥락에선 극단적인 수단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업권은 노동조합 활동의 핵심이다. 노동조합은 파업권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며, 사용자는 이들이 파업에 이르기 전 협상을 통해서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용자가 노동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손배가압류를 집행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노란봉투법황건적 보호법라며 반대한다. 이 표현은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노동자와 노동을 어떻게 보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구성원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동자는 대화의 상대가 아닌 억압의 대상이다.

 

과연 노동자들은 약탈을 일삼는 황건적인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야 말로 성실히 일해 땀흘려 돈 버는 사람이 아닌가? 부정 축재로, 뇌물로, 각종 불법이 손배가압류 때문에 탈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일부 기득권자들이 더 큰 문제 아닐까? 오히려 부패 기득권층이 사회제도를 교란시켜 선량한 시민의 마음을 약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기득권자들이 노동을 보는 관점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단순히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을 자본에 종속시켰고, 인간을 노동에 종속시켰다. 최종적으로 인간도 자본에 종속시켰다. 그 노동에는 인간이 없다. 이런 왜곡된 노동관으로 인해 노동자에게 노동은 ()’이 된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은 인간성을 구현한다고 가르친다. “인간만이 홀로 하느님을 닮았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는 가르쳐주고 있다.”(노동하는 인간, 25)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타고난 능력의 일부를 발휘하고 실현한다.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28)

 

노동의 가치가 무시된 사회, 모든 것이 자본에 종속된 사회, 그래서 노동이 벌이 된 사회는 그 자체로 반교회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를 위해서도 또 노동자의 존엄성을 위해서도 노동자의 노동조합 활동은 보장되어야 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활동의 핵심인 파업권을 무력화시키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노란봉투 캠페인을 넘어 노란봉투법의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이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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