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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838년 예수회 메릴랜드 노예매매가 주는 교훈

김민SJ 121.♡.235.108
2022.08.22 14:35 38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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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2016년 4월 16일 뉴욕타임스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조지타운 대학교를 구하기 위해 272명의 노예들이 팔렸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사회에서 조지타운 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유수의 예수회 대학인 조지타운 대학교가 당시 예수회 메릴랜드 관구 소유의 노예들을 매매함으로써 얻게 된 이윤을 통해서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이 기사를 쓴 레이첼 스완슨은 영리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 ‘1838년 메릴랜드 예수회의 노예매매’로 알려진 역사를 다루면서 스완슨은 이 매매로 팔려나간 272명의 노예 중의 한 명이자 매매 당시 13세 소년이었던 커넬리어스 호킨스의 이야기를 추적함으로써 이 역사적 사실에 생생한 색을 입힐 수 있었다.
 
1800년대 초반 미국 메릴랜드주에 예수회의 선교지역이 있었다. 예수회 메릴랜드 선교지에는 여느 다른 남부지역처럼 노예들을 노동력의 기반으로 삼은 플랜테이션이 여럿 있어서 이 플랜테이션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사도직 활동과 무엇보다 조지타운이라는 중요한 예수회 교육거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플랜테이션의 수익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1800년대 초반에만 하더라도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은 목화가 아니라 담배 등을 재배하였다) 메릴랜드 예수회 선교본부 내에서는 굳이 노예제라는 찜찜할 뿐만 아니라 일부 예수회원에게는 비도덕적으로까지 보이는 시스템에 기반한 플랜테이션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졌다.
 
게다가 당시 예수회 총장이었던 얀 루트한은 노예제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고 따라서 메릴랜드의 일부 예수회원들이 제시했던, 예수회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을 매각하여 조지타운 대학교의 부채를 청산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내켜하지 않았다. “노예를 매매함으로써 우리 영혼에 끼치는 해악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재정적인 재난을 맞이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 루트한의 입장이었다. 이때 두 명의 미국인 예수회원이 등장하였다. 한참 조지타운 대학에 건물을 올리고 있었던 멀메디 신부와 당시 메릴랜드 관구로 승격된 메릴랜드 선교지 책임자(1838년 당시에는 관구장이 되었던) 맥셰리 신부는 루트한 총장을 설득하여 드디어 노예의 매매에 대한 총장 허락을 받아냈다.
 
뉴욕타임스의 2016년 기사에서는 매우 간략하게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이 결정에 대한 메릴랜드 관구의 예수회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일부 예수회원들은 노골적으로 노예매매 결정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일단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말이다. 이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노예매매로 인하여 다른 남부지역의 플랜테이션에 팔려간 예수회 노예들이 그동안 예수회 사제들이 이들에게 제공했던 영적 정신적 돌봄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가족이 갈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특히 루트한 총장도 노예의 매각을 허락하면서 단서로 달았던 것이 가족들이 결코 갈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1838년에 매각된 272명의 노예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설사 첫 번째 매각에서 가족 단위로 매매되었더라도 팔려간 농장주에 의해서 재매각되면서 가족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1848년 이들이 팔려간 루이지애나의 농장을 찾아갔던 네덜란드 출신 예수회원 제임스 반 데 벨데 신부는 편지에서 “노예들은 거의 종교적인 의무를 준수할 수도 없었고 아이들 일부는 세례도 받지 못하고 그 어떤 종교교육도 없이 자라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뉴욕타임스의 레이첼 스완슨에 따르면, 이 잊혀진 어두운 역사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동문이자 회사의 고위경영자였던 리차드 셀리니에 의해서 들춰졌다. 당시 조지타운 대학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1838년 노예매매라는 대학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기억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는데, 셀리니는 개인적으로 8명의 가계계보학자들을 고용하여 272명의 팔려간 노예들의 후손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곧 커넬리어스 호킨스라는 1838년 당시 13세의 흑인노예소년의 후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어서 새롭게 다른 후손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GU 272, 즉 ‘조지타운의 272명’을 기리는 단체를 조직하여 이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과 후손들의 조지타운 대학교 입학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
  
위에 소개한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1838년 예수회 메릴랜드 노예매매의 재발견이 최근의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1980년대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깊이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1983년 로버트 엠메트 쿠란은 이 사건에 대하여 매우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역사학은 원거리에서 촬영된 빛바랜 흑백의 스냅사진과 같다. 전체적인 맥락과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얼굴의 표정들, 눈빛은 읽어내기가 힘들다. 그런 점에서 역사책은 일종의 망원경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과도 같다. 반면에 문제의 뉴욕타임스의 기사와 같은 르포르타주나 미시사는 훨씬 생동감이 있고 등장인물의 표정과 눈빛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지만 자칫하면 전체적인 맥락은 놓치기 쉽다. 그런 점에서 이는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과도 같다.
 
1838년 예수회 메릴랜드 노예매매도 마찬가지이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매우 생동감있게 우리에게 사건을 알려주고 심지어 그 후손들이 느낄 비통함까지 전달해 주지만,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너무나 간략하게밖에 알려주지 못한다. 1838년 노예매매 사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한번 바라보자.
 
첫째, 노예제에 대해서. 이 주제는 한정된 지면에서 도저히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래도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우선 1838년 예수회 메릴린드 관구의 노예매매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예수회가 노예제와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인신매매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노예제의 시스템보다는 감히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인간을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유대성이 파괴되는 장면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는 노예제의 본질적인 한 요소인 것은 맞지만, 단지 노예를 거느리는 것을 떠나서 노예의 매매에 적극 관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노예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도 애매했다. 교회에서는 1839년 그레고리우스 16세가 회칙을 통해서 노예매매에 가톨릭 신자들이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노예제 자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다만 이 경우 그리스도인이 같은 신앙의 형제를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이었을 뿐, 이교도나 무신론자,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예수회의 입장도 복잡했다. 예수회원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 세례 받은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혐오하였지만 메릴랜드의 경우에서처럼 흑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둘째, 예수회 메릴랜드 선교지역/관구의 복잡한 사정. 앞서 뉴욕타임스의 기사에서 언급한 두 명의 미국인 예수회원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멀메디 신부와 맥셰리 신부. 이 둘은 조지타운 대학의 발전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고 그렇기에 이들의 이름을 건물 이름을 세울 정도였지만, 2016년 이후 이 둘의 이름은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메릴랜드 관구에는 세 부류의 예수회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메릴랜드 명문 농장주 가문 출신의 예수회원들. 이들은 미국 남부의 귀족적인 대농장 가문의 문화적 유산을 상속한 이들로 이들에게 플랜테이션은 메릴랜드에 상륙한 영국 이주민의 뿌리와 유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838년 노예매매에 대해서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이는 자신의 문화적 뿌리인 플랜테이션 체제와의 결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멀메디 신부와 맥셰리 신부는 이들의 대척에 선 인물로, 이들은 최초로 로마에서 유학한 메릴랜드 출신 예수회원으로, 노예제도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수고스러움에 비해서 이득이 변변치 않은 플랜테이션 체제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멀메디 신부는 예수회원들이 플랜테이션 운영과 같은 세속적인 사업에 관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들 농장들은 예수회에 저주가 되고 있습니다. ... 이들은 농부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고 수도자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안 좋은 방식으로 합쳐진 것입니다.”(1835년 멀메디 신부의 예수회 총장 보고) 
 
여기에 더하여 세 번째 부류가 있었다. 이른바 이주 예수회원(immigrant Jesuits)이라고 불리는 부류로, 이들은 폴란드와 프랑스, 네델란드와 같은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로 이들은 노예제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였고, 특히 1838년 노예매매에 대해서 마치 신자들이 흩어지게 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제의 심정으로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이 세 번째 부류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첫 번째 부류와 같은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838년 메릴랜드 노예매매가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고려보다는 예수회 관구의 일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의 인물들(멀메디 신부와 맥셰인 신부)은 오히려 개혁파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메디 신부와 맥셰리 신부의 결정은 최악의 결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마치 비정규직 이슈 앞에서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에 대해서 반대하니 비정규직을 공급하는 업체와 계약을 해제하는 것과도 같은 무신경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대중적인 표상이 따른다. 우리의 결정, 우리의 언행은 대중적인 표상을 통해서 필터링되며, 이때 우리의 동기나 취지는 모조리 휘발되어 버리고 남는 것은 체에 걸려 남아버린 대중적인 표상들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신중해야 하며 섬세해야 한다. 2017년 4월 18일 예수회 캐나다-미국 지역구 의장 티모시 케시키 신부는 조지타운 대학의 미사에서 다음의 말로 강론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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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대학 미사에서 1838년 노예매매에 대해서 사과하는 케시키 신부 (출처 조지타운 대학교)

 
“우리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과연 케시키 신부가 역사를 몰랐을까? 케시키 신부는 1838년 노예매매 사건을 어쭙잖은 역사적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사과하는 편을 택했다. 그는 200여년 전 선배 예수회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바를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공적인 담론은 대중적인 표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 대중적인 표상에는 맥락의 자리는 없다는 것.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과연 수도회가 경제적 재정적인 문제를 다룰 때, 이들의 의사결정이 순수히 경제적 재정적일 수 있는가? 멀메디 신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논란 많은 플랜테이션 산업을 정리하고 은행 이자와 보다 건전한 신탁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그 방법은 최악의 윤리적 실패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경제적인 활동이 더욱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경제적 선택을 윤리적으로 행할 것인가? 1838년 예수회 메릴랜드 노예매매가 우리에게 던지는 쉽지 않은 화두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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