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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2019년에 다시 읽는 '새로운 사태'

정다빈 163.♡.183.94
2020.01.09 14:54 8,813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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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로운 사태, 존엄한 노동을 위한 찬가

 

1891, 교회가 마주한 새로운 사태

 

참으로 부당한 일은 인간을 마치 이윤 추구를 위한 물건처럼 마구 다루는 것이고 오직 노동 기술이나 노동력으로써만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득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마치 물건 취급하듯 무차별 혹사시키는 악덕 기업주들의 인권 유린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이다.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구구절절 타당하게 느껴지는 이 문장들은 놀랍게도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 발췌한 것이다.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사태>는 사회 교리에 관한 첫 교황회칙으로 가난한 사람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일깨우는 예언자적 문헌이다. 이후 발표된 보석과 같은 사회교리 문헌의 상당수가 <새로운 사태> 반포를 기념하거나 <새로운 사태>가 천명한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2019, 죽음이 통계가 되는 사회

 

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 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나와 내 자식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행운에 감사할 뿐,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간다.”

 

전쟁이나 학살 현장의 증언이 아니다. 김훈 작가가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부쳐 발표한 글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로 매년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사고나 질병으로 숨진다. 지난 11월 경향신문의 산업재해 사망에 관한 심층 보도에 따르면, 20181월부터 20199월까지 산업 현장에서 1,692건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 이름과 나이, 사망원인을 나열한 1121일 경향신문 1면의 헤드라인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였다. 매일 매일 김용균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조차 무감해진다.

 

 

다시, 새로운 사태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즉각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심각한 상태의 악이 지연으로 인해 치유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일을 미루다 보면 그토록 심각한 악을 퇴치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태>를 읽다 보면 이처럼 산업혁명 후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는 비참한 현실과 사회주의의 거세지는 도전에 지금 당장 교회가 응답해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 인식이 엿보인다. 1891년의 교회는 당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된 노동자 문제를 그리스도교 진리와 사랑에 근거해 답을 제시하고, 국가와 자본가, 노동자 그리고 교회가 악에 맞서 각자의 역할을 당장 행할 것을 촉구한다.

 

2019년의 참담한 현실 앞에 남는 것은 질문이다. 1891년의 현실과 달리 오늘날의 악은 더욱 식별하기 어렵고 맞서기 어려운 교묘한 형태로 노동자들을 내몰고 있다. 대항해야 할 악이 명징하지 않기에 그 답을 찾기도 쉽지 않다. 노동자들의 존엄한 노동을 위한 법과 제도는 개선되어왔으나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김용균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후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지만, 현장 노동자 사고는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다단계 하도급으로 인한 비용감축은 속도와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과 휴식을 희생시키고 이윤 추구와 비용 절감이라는 시장의 논리는 마치 진리처럼 둔갑한다. 그러나 어떤 논리도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다.

 

 

다시, 사회교리

 

청년의 눈으로 읽는 사회교리라는 분에 넘치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예상 가능한 선택은 아닌가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새로운 사태>를 함께 읽고자 했던 것은 비단, 이 회칙이 갖는 역사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태>가 제시하는 결정적 해결책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회칙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말한다.

 

각자 최선을 다하여 공동선의 증진에 이바지하고 특히 자기의 안녕을 보살피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해야 하며 또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모든 덕의 근원이고 절정인 애덕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염원하는 안녕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널리 확산되어 생겨난 결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는 사랑은 그 자체 안에 복음 전체를 요약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항상 자신을 희생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그리스도교 사랑, 곧 애덕이다.”

 

물론 애덕의 정신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경제적인 불의가 사회구조의 모순에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마음의 회심을 촉구하는 것이 얼핏 교회의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새로운 사태>가 말하는 애덕의 정신은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회심과 맞닿아있다.

 

법과 제도는 분명 정의를 위한 중요한 주춧돌이 되지만 법이나 제도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식의 전환이며 가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1891년부터 2019년 존엄한 노동을 위한 법과 제도는 눈부신 개선을 이뤘으나 인간을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처럼 다루며, 노동 기술이나 노동력으로써만 인간을 평가하는 문화, 이득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마치 물건 취급하는자본의 논리는 1891년에서 얼마나 달라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기 어려운 악에 맞서며 교회 안에서조차 눈에 보이는 문제에 대항하는 해결책을 쫓아온 것은 아닐까? 사회교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태>는 심각한 상태에 처한 노동자들의 인권증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20세기 이후 독일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의 노동 관련법안 제정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로운 사태>는 인간을 인간 그대로 바라보는 인간 존엄성과 도구가 아닌 인격으로서 이행하는 존엄한 노동에 대한 찬가다.

 

법과 제도 개선을 위한 싸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무감한 우리 안의 문화를 바꾸는 전환이다. 마주한 현실이 냉담할수록 복음 안에서, 사랑의 실천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자, <새로운 사태> 그리고 사회교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정다빈 멜라니아 연구원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서른 살에 읽는 사회교리'를 주제로 기고 중인 칼럼을 웹진 인연에도 게시합니다. 

원고 본문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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